삶의 예기치 못한 복병들
최숙희
밖에 트렁크 열어놓은 차 당신거지? 깜짝 놀라 나가 보았다. 우리가게 앞은 손님들이 차를 쉽게 대라고 양보하고 나는 항상 멀찌감치 차를 댄다. 저 멀리 나란히 주차된 차들 중 내차 트렁크 문만 활짝 열려진 게 보인다. 이게 무슨 일이람, 머릿속이 갑자기 하얘진다. 나이 들며 점점 까칠하고 인정머리 없어지는 남편은 내 건망증을 염려하는 척하며 당장 병원에 가서 치매검사를 받아보란다. 환자로 몰려 빈축을 사도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작년에 치매진단을 받은 친정아버지 얘기를 꺼내며 유전 운운 안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남편에게 그만한 눈치가 생기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흘렀다. 평소 입바른 말을 잘한다며 남편에게 ‘깐죽이’라고 종종 놀림을 받는 나도 오늘은 입을 꼭 다문다. 이젠 말을 아껴야 가정의 평화가 유지됨을 알기 때문이다. 가깝다는 핑계로 서로 심기를 건드리고 상처 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남편이 홈디포에 간다기에 내차를 가져가 근처 코스코에서 기름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수영가방, 컴퓨터, 책 등으로 어지러운 차를 보면 분명 잔소리 하겠지 싶었다. 차안에 있는 물건을 트렁크로 옮긴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는 생각이 안 난다. 필름이 끊겼다는 게 이런 건가. 내가 살며시 닫은 문이 스르륵 저절로 열렸나, 설마 트렁크 닫는 걸 까먹었을 리야.
친구랑 산책 중에 내가 치매환자로 몰린 얘기를 했다. 딸기 몇 알 남은 거 오랜만에 집에 들른 아들 먹이려는데 날름 집어먹는 남편을 제지했더니 삐졌다며 흉을 보았다. 친구는 삼겹살을 굽다가 자기는 고기 뒤집고 한입 크기로 자르며 가족들 시중드느라 한 점도 못 먹었는데 남편이 “이제, 그만 굽지” 하더란 얘기를 했다. 코로나 사태로 막연한 공포감에 움츠러들었다가 눈치 없는 남편들 덕분에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영원히 중년일 줄 알았다. 노년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다.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돈 걱정 안하며, 건강을 챙겨 은퇴 후 여행이나 많이 다니자 했다. 깜박깜박 건망증이 생기니 종국에는 치매가 올수도 있겠다. 더군다나 친정아버지가 치매가 아닌가. 건강한 생활습관과 건강한 뇌 만들기는 치매에 대한 보험이란다. 규칙적인 운동과 채소와 생선을 골고루 먹기, 부지런히 읽고 쓰기를 통해 뇌건강을 유지하라는 조언이다.
사상 초유의 코로나사태가 우리의 일상을 집어삼킨듯하다.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자주 손 씻기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는 지침밖에 없으니 답답하다. 모두들 ‘설마 내가’ ‘혹시 내가’ 하며 불안한 마음이다. 혹시 있을지 모를 도시폐쇄에 사재기 난전을 만드니 인간 이기심의 극치를 본다. 치매와 코로나바이러스는 삶의 예기치 못한 복병이다. 예방책이 나와 있으니 철저히 실천하며 의연한 자세를 보여야 할텐데. 그나저나 체육관도 못가고 주말산행도 모두 취소되니 규칙적 운동을 어디서 해서 면역력을 키우나. 침이 안 튀길 정도의 거리를 두라니 남편과도 각방을 써야하나. 그간 평범한 일상이 기적이었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3/20/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