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란 무엇인가 / 최민자

 

 

글만 안 쓰면 작가도 꽤 괜찮은 직종인데 말야.

 

글쟁이 몇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그런 농담을 했다옳소아니 얼쑤다타이틀만 빌어다 쓸 수 있다면 그보다 폼나는 행세도 없을 테니영혼이 자유로운 보헤미안에먹물 냄새 비슷한 아우라를 풍기며 먹고사니즘과는 다른 차원으로 보편적 윤리 너머 미학적 탈주를 꿈꾸는.

 

작가란 무엇인가문자 그대로 '지어내는 일에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이다.'짓다'라는 말에는 '만들다'와는 다른고유의 개별성이 깃들여 있다밥을 짓다집을 짓다글을 짓다와 같이 무엇인가를 만들되 획일화 모듈화 일반화된 기성물이 아닌노고와 정성취향과 자질 같은 자기만의 디테일이 가미되어 있다는 뜻이다같은 나무를 심어도 복길이네 사과와 금동이네 사과가 때깔과 향기씨알이 다른 것은 농사 또한 제각각의 방식과 땀방울로 공들여 '짓는과정이고 결과여서일 것이다하니 작가가 내놓는 작품들은 어제와 똑같은 루틴으로 같은 모판에서 찍혀 나온 두부여서는 안 된다원점에서부터 새 판을 짜 시간과 정성과 혼을 불어넣는 창의적 수제품이어 야 한다.

 

작가는 실상 일용직이다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날품팔이처럼 매일 매 순간 백지에서 출발한다어제의 베스트셀러가 오늘의 인세를 보장해주어도 오늘 쓰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다꾸준히지치지 않고새롭게 쓰는 사람이 작가다사냥감을 찾는 수사자처럼 예리하게 버려진 감각으로 끊임없이 눈빛을 번뜩 거리는 사람강고하게 엉겨 붙은 기억의 지층이나 지리멸렬 한 일상의 갈피를 뒤져 한 줌의 광채를 채굴해 나오는 막장 노동을 불사할 줄 아는 사람이 작가다.

 

종로 어디쯤에서 김 시인님하고 부르면 열 사람쯤은 돌아 볼 거라는 시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수필 동네 역시 다르지 않다일 년에 고작 몇 꼭지도 안 되는 글을 발표하면서 이런저런 모임에 얼굴을 내밀고 온갖 연줄과 방편을 동원해 시답잖은 직책을 완장처럼 휘두르며 작가 연()하는 사람도 많다작가가 글을 지어내지 않으면 미안하지만 그는 작가가 아니다전직 작가이거나 작가이고픈 사이비(似而非)멈추어 있어도 끊임없이 뇌를 회전시키고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를 눌러앉혀 순정한 눈과 죄 없는 손가락을 마구마구 혹사하는 사람이 작가다.

 

만 권의 책을 머릿속에 쟁여야 그것이 흘러넘쳐 글이 되고 그림이 된다는 추사 선생의 말씀처럼천 권을 읽어도 한 줄을 건지기 어려운 연비 낮은 레드오션이 작가들이 사는 세상일 것이다모든 게 이미 드러나 버린 세상하늘 아래 새것이 어 디 있는가기왕 있는 것들을 새롭게 해석해 자기만의 시선과 각주를 덧붙여 의미를 부여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그만그만한 식재료로 매끼 다른 밥상을 차려내 야 했던 우리네 가난한 어머니들처럼 일상의 갈피갈피에 숨겨 진 사람살이의 비의를 맛깔스럽게 드러내 보이는 예리한 스포 일러그것이 수필을 시와 철학 사이일상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자리에 모셔두고 싶었던 내 문학적 지향이었거늘.

 

이런저런 일상에 휘둘리느라 하루해를 속절없이 허비하고서 절인 배추처럼 쓰러져 눕는다베개에 어깨를 비스듬히 받치고 침대 머리에 뒤통수를 기댄 채 원고지도 노트북도 아닌 손바닥만 한 폰 위에서 어설픈 손가락 춤이나 추며 가까스로 문맥을 잇고 있는 나머리맡에 수북한 책들을 외면하고 일상 의 여러 일들에 포섭되어 소출도 없이 시간을 떠내려 보내는 나는()인가 가()아닌가작가인 척하고 작가이고 싶지만 일가를 이루기엔 턱없이 모자라다는 부끄러운 자각이 내 안에 있다그래도 작가라고작가여야 한다고 지푸라기 한 줄이라 도 붙들고 싶은 건 작가라는 직종이 후줄근한 입성을 반짝 빛 내줄 금단추 같아 보여서가 아니다그나마 그 말고는모판 위에 활자를 쪼아 넣는 몰입의 순간 아니고는 나를 나이게 하는 존재감이 어디서도 찾아지지 않아서이다.

 

하여 성취에 상관없이 작가에 대한 내 정의도 살짝 수정해 야 할 것 같다지어내는 일에 일가를 이루지는 못하였어도일가를 이루기 위해 지치지 않고 정진하는 사람지어내는 일을 기꺼워하고 쓰는 일을 앞자리로 모셔둘 줄 아는 사람 정도로. 인생이 목적이 아닌 과정이듯이 만사가 길 위의 일 아닌가먹음직스러운 붉은 대봉을 가지가 찢어지게 주렁주렁 달아 걸지 못하고 까치에 먹힌 먹감 몇 알 쓸쓸히 달고 있어도 한 생을 전심전력 살아냈으면 감나무는 어쨌건 나름 일가를 이룬 셈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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