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짜 / 배귀선

 

 

바람이 이는지 비가 기울어진다. 간절한 그리움인 듯 새 한 마리 비 맞으며 허공에 편지를 쓰고 있다. 이내 어디선가 나타난 파랑새를 따라 회색 하늘에 스미듯 사라진다. 사라진 것들이 남긴 허공은 더 휑하다. 허전함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해거름을 밟고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형님아우 지내는 이웃의 미장이 황 씨다. 비 오는 덕에 쉬는 날이지 싶다. 별러왔던 막걸리나 나 한잔하자며 재촉이다. 주섬주섬 챙겨 입고 따라나선다. 평생 미장일을 해 온 흔적인지 앞서가는 황 씨의 오른쪽 어깨가 더 처져 있다. 저 진액을 녹여 식솔을 건사했을 터. 구부정한 세월이 무겁게 다가온다.

낙천적인 심성만큼이나 매사 넉넉한 황 씨는 나이 40이 되어서야 장가를 갔다. 늘그막에 얻은 5남매를 키울 일이 심란하기도 하련만 늘 싱글벙글댄다. 환갑이 넘은 황 씨의 아내는 자유분방한 사람이다. 자유롭다 못해 아내의 자리마저 잊어버리고 며칠, 혹은 몇 달씩 집을 비운다. 나이 차이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는 풍문도 있고, 감춰놓은 기둥서방이 있다는 말도 있다. 그렇든 저렇든 황 씨는 아내를 부처님, 예수님이라 부르며 그냥 산다. 무엇을 무엇이라 판단 분별을 하지 않는 황 씨야말로 어쩌면 현인인 듯싶다.

오락가락하는 비를 앞세워 시장 골목으로 들어선다. 비릿한 냄새가 마중한다. 비 오는 날 생것전에서 나는 냄새는 삶의 애환이 짙어서 좋다.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을 돌아 돼지 머리와 내장이 끓고 있는 국밥집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늙은 주모의 기분에 따라 공짜 국물에 든 고깃점이 달라지기에 표정을 이리저리 살핀다. 글도 삶도 허름한 내가 즐겨 찾는 이곳은 막걸리 한 병에 이천 원이다. 만 원 지폐 한 장이면 기분 좋을 만큼 취할 수 있다. 옛날부터 비 오는 날이면 고라실 영감들이 농사일 밀쳐두고 주모의 궁둥이라도 볼 요량으로 찾아와 막걸리 한 병 놓고 종일 앉아 있곤 했었다. 오가는 은근한 입담 듣는 재미는 덤이다.

눈치를 보던 황 씨가 막걸리 한 잔 따르며 머리 허연 맞선을 안주로 탁자에 올려놓는다. 오가며 당겨둔 궁둥이며 힐금힐금 봐두었던 마음새를 미장이 사십여 년 솜씨로 매끈하게도 편다. 앞니 빠진 틈새로 새나오는 분냄새 짙은 말, 못 들은 척 내심 따순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말에 딴전부리듯 나는, 잠자코 흥덩헌 국물 속 고깃점을 찾아 생각 한 입 우물거리고 있었다.

"함바집을 허는 여잔디 말일세, 음석 잘 맹글고 아새끼들은 다 커부러서 나갔응게, 아~ 두 사람 만나서 잘 허고 살믄 안 좋겄능가"

유난히 목소리 큰 황 씨의 진한 말에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아랑곳없이 황 씨는 거나해진 말을 더 걸친다.

"아, 이 사람아 인자는 인생이 백 살이라는디 오십 쪼까 넘어갔고 고로코롬 살랑가? 아랫도리나 실허게 잘 간수 혀서 그 여자 한번 만나보는 것은 어찐가."

내친김에 당장 오라해서 만나보자는 말에 나 같은 반거충이가 괜한 사람 데려다 고생시킨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옆구리 허퉁한 내심은 솔깃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안주로 올려진 함바집 여자의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우리의 야심한 거래를 들은 듯 옆자리의 여자들이 소곤대며 희끗한 내 머리를 바라보다가 아랫도리에도 눈길을 낸다. 못 본 척, 찌그러진 양재기 들어 올려 목울대를 축이면서도 왠지 고봉밥 같은 함바집 여자가 밀창문 열고 들어설 것 같아 자꾸 눈이 쏠린다. 허나, 국밥집에 불이 꺼지도록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축축한 바람 한 줄기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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