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도시(Caffe Glen) / 정희승
내 안의 날씨 때문에, 내 안에 부는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날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요즈음 그런 날이 잦다. 그때마다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지금껏 나는 어떤 보람이나 의미도 없이 헛되이 살지는 않았다. 나를 위해 이미 고독을 완성해두었으니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단지 이 도시에는 고독을 감싸줄 아늑한 장소가 부족해 아쉬울 뿐이다. 그래도 걷다 보면 무심한 나의 발걸음이 이끄는 곳이 있다. 나는 에스프레소 한 잔 뒤에, 또는 따뜻한 우동 한 그릇 뒤에 살만한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도시에서는 자신의 신념과 열정만 따라가서는 안 된다. 가끔 정처없는 발길에 자신을 내맡겨둘 필요도 있다. 그렇게 걷다 보면 발길은 어김없이 평소에 꿈꾸어 왔던 바로 그 장소로 이끌 것이다. 나는 좋은 장소는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불현듯 맞닥뜨리는 추억처럼 존재한다고 믿는다. 집에서 1km쯤 떨어진 Caffe Glen은 바로 그런 곳이다.
그곳에서 차 한 잔 마시는 일이 분에 넘치는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지리멸렬하고 답답하고 심란할 때라면 특히. 이제 어떤 성취감도 없는, 목적 아닌 목적을 사랑할 나이가 되었다.
외출할 때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옷을 입지 않는다. 나는 괴짜나 멋쟁이, 개성이 강한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다. 나는 옷에 의해 규정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걸치고 집을 나서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를 올바르게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옷에 관한 한 느슨하고 차분하면서도 섬세한 감각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걷는 사람은 자신만의 디름을 갖게 마련이다. 신은 운명의 큰 줄기만 정해놓았을 뿐 세부는 알아서 채우도록 인간에게 맡겨두었다. 그래서 저마다 고유리듬[idio-rhythm]을 실천하면서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음악뿐 아니라 산책에서도 '템포 루바토tempo rubato'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도둑맞은 템포'라는 뜻으로 낭만주의 음악가인 쇼팽이 즐겨 사용해 널리 알려졌다. 선율에 다양한 표정을 부여하기 위해 특정 음이나 패시지를 느리게 혹은 빠르게 연주하는 기법을 말한다. 만약 어떤 루바토도 없이, 메트로놈이 율법학자처럼 정확하게 규정하는 템포로 걷는다고 상상해보라. 얼마나 단조롭고 건조한 산책이 되겠는가. 오로지 건강만을 위한 산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영감을 얻고 고유한 리듬을 창조함으로써 삶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피아노의 시인인 쇼팽이야말로 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 음악가였다.
Caffe Glen에 가는 길에 해찰하고 한눈 팔다가 자주 박자를 잃는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자는 자신의 삶을 자주 루바토로 연주한다. 나 역시 삶의 허튼가락에 장단을 맞추는 느긋한 보행자다.
아파트 수위실 앞에는 오늘도 비둘기 대여섯 마리가 꽁지를 땅에 대고서 모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꼭 고양이들이 앉아 있는 것 같다. 경계를 풀고 있을 때 비둘기는 저런 자세를 취한다. 수위아저씨 말에 의하면, 주민이 내놓은 묵은쌀을 버리기 아까워서 뿌려주었더니,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저렇게 달라고 보챈단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바로 큰길이 나온다. 차와 사람 모두 자신의 서사에 쫓겨 바삐 움직인다. 도시의 리듬에 흠뻑 취해 있다.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가는 미시족, 발목이 드러나는 팬츠에 스니커즈를 신고서 달려가는 사내, 유모차를 밀며 병원이 있는 빌딩으로 들어가는 젊은 엄마, 이어폰을 끼고 머리를 까닥거리며 걷는 단발머리 여학생, 어깨를 맞대고 걷는 부부, 산책 나온 배가 나온 아저씨, 탐스러운 털이 나부끼는 포메라니안을 앞세우고 가는 나이든 여자…. 아무도 나에게 악수를 청하지 않는다. 그저 무심히 지나칠 뿐이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은 온전히 보존된다.
몇 블록 지나 아담한 공원에 들어서니 길가에 늘어선 댕강나무 산울타리에서 그윽한 꽃향기가 밀려든다. 공원에는 푸른 조끼를 입은 청소부 아주머니들만 벤치에 앉아 있을 뿐 아무도 없다. 길어져 가는 그림자가 무겁게 느껴져 걷는 속도를 조금 늦춘다. 경험에 비춰보건대 댕강나무는 10월이 넘어서까지 꽃을 달고 있을 것이다. 넓은 잔디밭을 끼고 돌아 공원 맞은편 끝에 있는 분수대에 이른다. 물이 나오는 시간대가 지나서인지 바닥이 이미 말라 있다. 분출하고픈 내밀한 욕망을 간직한 노즐들만 햇볕에 반짝거릴 뿐. 조금 쓸쓸하게 느껴지는 분수대를 지나 네거리 쪽으로 향하다가, 머리 위에 구름 하나가 페르마타처럼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아, 얼마 만에 올려다보는 하늘인가. 푸른 하늘을 보니 살아 있음이 정녕 눈물겹다.
카페 문을 밀고 들어서니 그윽한 커피향이 나를 포근하게 감싼다. 좋은 카페는 바쁘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벗어나 이렇게 천천히 나이 들어가는 고요한 악장을 간직하고 있다. 무심함의 본질을 이해하는 곳이기도 하다.
늘 그렇듯 빛이 들치는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실내조명이 조금 어두워 그곳이 책을 읽기에 편해서다. 커피만을 마실 목적으로 이곳에 오지 않는다. 나에게는 정신의 행간에도 향이 필요하다. 오늘은 폴 모랑의 밤에 관한 얇은 소설을 읽는다. 하지만 그것도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갈수록 침침해지는 눈이 금세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책만 읽지는 않는다. 가끔 고개를 들어 무심히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살아온 시간 또한 불멸의 향과 잘 어울린다.
경쾌한 수신음과 함께 코로나 안전안내문자가 휴대폰 화면에 뜬다.
아, 어쩌나.
안은 이렇게 평온한데, 슬픔조차도 감미로운 폴김의 노래가 흐르는데, 밖에는 바람이 부나 보다. 맞은편 '그라찌에' 파스타 전문점에서 남자친구와 막 거리로 나온 젊은 여자의 스커트 자락이 어지럽게 나부낀다. 여자는 재빨리 손을 내려 스커트 한쪽을 붙잡는다. 게다가 지금은 눈이 조금 부신 오후 네 시 반이다.
<선수필 202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