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를 파는 아주머니 / 김순남
오늘은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 날이다. 유난히 몸이 무겁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 가끔 있다. 그럴 때는 독서를 해도 눈으로만 글자를 읽을 뿐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집안 청소라도 한바탕 하고나면 한결 좋으련만 몸이 불편하니 그 또한 마음뿐이다. 시장이라도 한 바퀴 돌아보면 기분이라도 나아질까 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장에는 요즘 한창 제철을 맞은 참외, 수박, 자두 등 과일과 채소들이 손님들 손길을 기다린다. 풋고추와 열무, 가지 등 채마밭을 옮겨온 듯하다. 생선 장수의 싱싱한 생선 사라는 외침이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화장품 가게 앞에는 음악소리에 맞춰 춤추는 풍선 인형이 신장개업을 알리는데 한몫 하고 있다. 활기찬 시장의 모습에도 나는 왠지 상인도 손님도 아닌 이방인인 듯하고 대형 스크린 속에 지나가는 시장 풍경을 보고 있는 듯하다.
시장을 다 돌았지만 뭐하나 산 것도 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오는 길이다. 버스정류장 옆에서 좌판을 펴고 노점상을 하는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려온다. 찬송가를 늘 부르는 걸로 보아 기독교 신자인 것 같다. 이순(耳順)은 훌쩍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는 파라솔 하나로 뜨거운 햇빛을 가리고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좌판 위에는 볶은 콩, 전병, 엿 등 몇 가지 군것질거리와 하얀 속살을 드러낸 더덕이 비닐 팩에 담겨져 있다. 그분은 손님을 기다리며 더덕 껍질을 까고 있다. 특유의 더덕 향이 온 정류장에 퍼져 코끝에 전해진다.
그곳 정류장은 시장과 병원, 은행 등이 가까이 있는 중앙통에 위치해 있다. 시내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버스가 정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농사일 하다 병원에 다녀가는 할머니, 이 지역이 초행이라는 청년도 아주머니께 행선지와 버스노선을 묻곤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며 자주 물어 오는 질문에 귀찮기도 하련마는 아주머니는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잘 알려 주신다.
그뿐이 아니다. 버스가 오자 더덕을 까면서도 행선지를 알리며 “할머니, 아까 버스시간 물으시더니 얼른 타세요.” “OO가는 차 왔으니 어서들 타세요.” 큰소리로 외친다. 가끔 이곳을 지나다 아주머니를 볼 때면 ‘참 친절하고 언제나 즐겁게 생활하시는 분이구나’하고 생각을 했었다. 괜스레 그분과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아주머니 어쩜 그렇게 즐겁게 일하세요?”
“그럼 즐겁게 살아야지, 얼굴 찡그리고 살면 뭐가 달라져요? 즐겁게 생활하다 보면 좋은 일도 저절로 따라 오더군요.”
힘없이 건넨 내 말에 아주머니의 힘찬 말소리와 웃음 가득한 얼굴은 동기간에게 건네는 따뜻한 마음같이 느껴져 발길을 머물게 한다.
아주머니의 대답이 옳은 말인 줄 알면서도 그리 못하고 살아간다. 그분도 어려움 없던 가정이 어느 시기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숱한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경제적 어려움에 마음이 편치 않으니 몸도 힘겨워 건강까지 잃었다며 지나온 이야기를 하셨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시작한 일이지만 정류장을 거쳐 가는 많은 사람들과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노점을 하는 일이 즐거워지고 지금은 단골손님도 제법 있어 장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다. 시련을 딛고 이렇게 늘 웃으며 생활할 수 있음을 감사히 여기다 보니 지나치는 행인들에게도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뭔가 물어오면 친절하게 일러 주기도 한단다.
더덕을 까다말고 사탕봉지를 꺼내 나를 비롯해 정류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박하사탕 하나씩을 나눠주신다. 머쓱해 하던 청년도 고개를 꾸벅하며 고맙다하고, 기운 없이 앉아 계시던 할머니는 반색을 하며 얼른 사탕을 입에 넣으신다. 모두들 사탕하나에 고마움을 눈빛으로 전하다.
나는 요즘 몸이 좀 아프다고 마음까지 축 처져서 삶의 활기를 잃었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며 일상에 감사한 마음보다 불평을 많이 하며 지냈다. 돌아보니 병원에서 허리 수술하고 회복되지 않아 힘들어 할 때, 고통 없이 제대로 걷기만 해도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마음껏 걷는 이들을 부러워하던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시장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고 가고 싶은 곳 내발로 걸어서 갈 수 있으니 이보다 감사해야 할 일이 어디 있을까. 조금의 불편함을 인내하지 못하고 불평만 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버스를 타고도 창밖으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여전히 잽싼 손놀림으로 더덕을 까는 모습을 보며 어느새 내 마음속에 먹구름은 모두 걷히고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아주머니께 사온 더덕을 자근자근 두드려 양념을 고루 발라 구워서 밥상에 올렸다. 과묵한 남편도 말은 없지만 모처럼 달라진 밥상에 젓가락질이 분주하다. 알싸한 더덕 향과 함께 오래오래 마음에 머무는 아주머니의 삶의 향기가 가득한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