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탄 여인 존 버거

 

 

 

부엌 창턱에 놓아 둔 구근이 싹을 뻗어내고 있다봄이 오면 감자 싹들은 빛을 찾아 마치 송곳인 양 판지를 뚫거나 심지어는 나무도 뚫고 나간다창턱에 놓인 구근이 지난 해 그녀가 보내 준 그것이라면 아마 작은 수선화 모양의 꽃을 피우리라손톱 크기보다 작은 꽃들짐승의 냄새와도 같은 얼얼한 향을 지닌북쪽의 꽃순록의 꽃.

부엌 찬장에는 역시 그녀가 손수 만들어 보내 준 꿀 케이스가 놓여 있다아무도 모를 그녀만의 조리법으로 만들어진당밀 파이와 비슷하지만 당밀 대신 꿀과 호두 가루를 섞어 만든 것이다헤이즐넛일지도 모른다어쨌든 스칸디나비아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찾아보기 쉽지 않을 그런 호두이리라.

테이블에는 아프리카 사탕과자가 놓여 있다아마 아프리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사탕이 들어 있는 작은 버들고리 궤만이 아프리카 것일지도 모른다.(상자 안쪽에는 우간다산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안에 들어 있는 검은색의 부드러운 과자는 일일이 손으로 싼 것으로예테보리에 있는 그녀의 부엌에서 만들어진 것이 맞을 것이다.

몇 년 전내가 토니 린드 그랜(Torgny Lindgren)을 발견한 것도 순전히 그녀 덕분이다그녀가 보낸 소포 꾸러미 중에내가 읽은 소에 관한 책 중 최고인 메랍의 미인(Mehrab’s Beauty)이 들어 있었다나는 그 이후 린드 그랜의 모든 책을 찾아 읽었다소포에 함께 부친 편지에 그녀는 이렇게 썼었다.

 

덴마크행 기선에 앉아 있어요석유 저장소가 늘어서 있는 긴 항구를 지나 예테보리를 벗어나는 중이지요모든 것이 변했어요보기에 따라서는 내항(內港)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요조선소는 손을 놓고 있고전부 개인 소유인 독일과 덴마크행 호텔급 기선들만 늘어서 있어요나는 이런 해상 호텔들이 싫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그리고 난 언제나 공짜로 배를 타요떠나기 직전에 자전거를 갖고 티켓 없이 배를 타거든요영하 사 도의 음울한 날씨예요라디오에서 들으니 내가 태어난 저 북쪽은 영하 삼십 도라는군요.”

 

이런 그녀가 4월 어느 오후엑스--뱅에서 멀지 않은 부르제 호숫가로 난 좁은 시골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라마르틴(Lamartine)의 시로 유명해진 호수였다.

 

끝없이 다음 기슭으로 내몰리며

돌아올 길 없는 영원의 암흑으로 실려 가면서

이 가없는 시간의 바다에우리 단 하루만이라도

닻을 내릴 수 없단 말인가.

 

대학 도시에서 노교수들이 타고 다니는 것 같은허리를 펴고 타는 보통 자전거였다실제로 그녀는 교사이기도 했다이란과 우간다 남민 학생들에게 스웨덴 문학을 가르쳤다그런데 자전거는 약간 변형되어 있었다핸들이나 안장페달은 그대로였다말고삐에서 떼어낸 작은 재갈 조각처럼 생긴 브레이크 장치를 포함하여 모든 부품들 역시 그대로였다자전거에 싣고 있는 것 때문에 변형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안장 가방이 마치 낙타 허리 살처럼 뒤 흙받이에 늘어뜨려져 있었다텐트와 우산물병 하나가 뒤 짐칸에 묶여 있었다헤드라이트 아래의 앞 짐바구니에는 지도와 로션말린 무화과가 든 봉투와 양초망치그리고 린드 그랜의 새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회색 곱슬머리의 여인은 부르제 호숫가로 난 좁은 시골길에서 천천히 페달을 밟고 있었다천천히 그러나 끝없이검은 푸조 605 한 대가 자전거를 탄 여인과 같은 방향으로 달리면서 다가왔다운전자는 전화를 하고 있었다그 남자는 길 너비를 잘못 어림했고 차의 뒷부분이 자전거 안장 가방의 오른쪽을 훑고 지나갔다자전거와 사람 모두 길 옆 도랑으로 처박혔다.

차는 서지 않았다어떤 무게가 실린 것이라야 사고나 충돌로 기록된다아무도 앞 창문에 부딪친 나비 때문에 차를 세우지는 않는다차가 받은 충격은 그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여인은 욕을 내뱉으면서 일어나 피해 상황을 살폈다자전거 먼저그런 다음 자신을앞바퀴가 휘었고 페달이 손상되었다그녀 자신은 무릎이 약간 베였다그녀의 피부는 대리석처럼 매끈했다일생에 건친 바닷물에서의 단련으로 그런 피부를 가지게 된 것이리라짙은 피가 흘렀다붕대로 무릎을 감고 길가에 앉아 다른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빵가게 차였다운전수는 그녀를 옌까지 데려다 주었다거기서 자전거 수리를 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앞바퀴를 새 것으로 갈아 끼고 무릎에는 붕대를 두른 채 북쪽을 향해 길을 떠났을 때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을에 도착한 그녀는 군용 방수 망토 차림이었다처음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푸른 눈동자는 검은 눈동자보가 덜 늙어 보인다는 말이 있다역경을 지나 온 얼굴이지만 눈동자는 소녀 같았다후에 나는 그녀가 결혼을 했고 장성한 두 자녀가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우리는 젖은 옷을 스토브 위에 널어 말렸고 수프와 치즈를 먹었다붕대를 푼 무릎에서 작은 상처를 보았다.

사흘이면 나을 거예요그녀가 말했다.

밖으로 나가 자전거 앞 바구니를 뒤적이더니 잼이 든 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모과 젤리당신 거예요이젠 가 봐야겠어요하지만 그 전에 조금 걷고 싶어요.

자전거는 층계참에 기대 놓았다반시간 남짓 지나자 앵초꽃 한 묶음을 뿌리째 들고 오더니 자전거 앞 바구니에 조심스레 놓았다.

먼 길인데 조금 늦은 게 아닐까요내가 말했다.

가끔은 밤에도 타요.

무섭지 않아요?

자전거가 있잖아요!

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흔든다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페달을 밟고 있었다받지 않고 주고만 싶어 하는 방랑자.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