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사는 카페 / 윤재천
특별한 인연이 없어도 살갑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으면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된다.
그의 체취가 자기 주변에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받아 잃었던 삶에 활기를 회복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집착에서 비롯되지만, 그 순기능順機能을 생각하면 애써 기피할 필요는 없다. 저마다 현실적인 문제에 매달려 정신을 쏟다보면 소중하게 생각되던 것마저 범상하게 여겨져 허허벌판에 혼자 있는 것 같은 공허감에 빠져들다가, 이전의 기억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 그 실체와 마주치게 되면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에 들뜰 때가 있다.
지금은 흐른 세월의 무게가 감당하기 어려워 겨우 흉내만 내지만, 이전에는 틈이 날 때마다 산에 오르고, 기회가 있으면 짐을 챙겨 길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소담한 모습으로, 자신만이 만들어내는 빛깔과 향내를 뿜어내며 서 있는 풀꽃을 비롯해, 지친 삶에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주어진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과 만나 살아가는 숨결을 통해 순박함을 느끼기 위해서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오히려 정이 가는 것들, 나는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보려고 애를 쓴다.
주말이면 동료들과 어울려 강원도 이름 없는 산 정상에 서 보기도하고, 관악산 바위 위에 걸터앉아 보기 위해, 곳곳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들과 이웃이 되기 위해, 그들 속에서 같은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다.
그때마다 짐을 챙겨 더 가야할지, 서둘러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야 할지, 마음을 결정하는데 절대적 기여를 했던 것이 구름이다. 그는 내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말없이 그윽한 눈빛으로, 또는 어두운 표정으로 자신의 의사를 특유의 얼굴로 피력하곤 한다.
늘 나를 내려다보면서 내 짙은 외로움을 삭이는 일에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구름 - 구름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이며,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던, 같은 구름으로만 보였다.
구름에 매료되고 동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해서 트랩을 내려오며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부터다. 영원히 와볼 수 없을 곳이라 생각했던 나라에 왔는데, 구름은 이미 먼저 와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릇처럼 바라본 하늘에서 조금 슬픈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 구름의 표정,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다그쳐 물을 수는 없었지만, 무슨 말을 내게 하고 싶어 했다.
그 땅에도 구름이 올 수 있고, 코발트 빛깔의 하늘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곳을 여행하는 동안, 나는 줄곧 구름을 바라보는 일에만 열중했다. 보고 봐도 싫증이 나지 않아서다.
내가 아호를 ‘운정雲亭’ - 구름 ‘운’자에 정자 ‘정亭’자로 하고, ‘구름카페’의 주인이 되고 싶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넓은 창과 길게 드리운 커튼, 고갱의 그림이 원시의 향수를 느끼게 하고, 무딘 첼로의 음률이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인간의 짙은 향내를 느끼게 하는 곳에서, 구름과 마주하고 싶어 붙여진 이름이고 소망이다.
이것은 이미 내 마음 안에 마련되어 있는 공간이기에, 소망이 아니고 현실로서의 카페다. 어려움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내 마음 안에 그런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이 구름과 다르지 않고, 여생 동안 그와의 동행을 거부할 의사가 없다.
아무 말 없이 흘러가는 대로 가다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그리움을 삭이고, 분노를 빛과 소리로 분출하는 구름, 나는 비가 내리거나 번개와 천둥이 주변을 어지럽힐 때면 그의 표정을 살피며 한동안 카페의 넓은 창을 통해 서 있곤 한다. 울음이나 감정의 폭발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믿어서다.
훗날, 가능만 하면 나는 구름으로 태어나고 싶다.
내가 그동안 쓴 글이나 누군가와 나누었던 말, 상대를 의식하며 평생 동안 했던 강의까지도 구름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싶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인식되고,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상관하고 싶지 않다. 이미 나를 떠나 허공에 흩어진 것들이다. 그들이 비가 되어 목마른 생명의 목을 적실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 분노도 혼자만의 답답함이고 안타까움일 뿐, 그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구름처럼 살아온 것같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누군가를 찾아 동행을 권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만족하며 살려고 한다.
맑은 날이면 밝은 차림으로 길을 나서서 갈 수 있는 데까지 유유히 산책하고, 물을 필요로 하는 생명이 있으면 어디선가 물을 가져와 생명을 살리고 싶다. 그러다 지치면 카페로 돌아와 조용히 쉬고 싶다.
어느 정도 피곤이 풀리면 그 자리에 장미 한 송이만 가져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는 마음 연약한 사람들을 초대해, 오래된 포도주를 꺼내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차를 끓여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싶다. 그들의 환한 얼굴을 바라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촛불이나 등잔에 기름을 채워 불을 붙여놓을 것이다.
이것이 내 소망이다.
이제 무엇이 더 필요한가.
내 문학은 그런 삶을 살기 위한 준비였을 뿐이다.
지금도 구름이 내 곁에 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를 위해 어떤 준비도 할 필요가 없다.
일상의 모습처럼 그와 마주앉아 서로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