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셔에서] 기억에 불이 켜지는 시간

 댓글 2026-03-26 (목) 12:00:00 성민희 수필 평론, 소설가
 
올해 들어 수필 공부를 하는 그룹에서 ‘자전 수필 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각자의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글을 풀어내자고 하니 약속이라도 한 듯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같은 시대를 관통해 왔음에도 각자가 그려내는 무늬는 너무 달라서 신기해하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산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아서 멀리서 보면 그저 그렇게 두루뭉술한 한평생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색깔과 촉감이 너무나 다양하고 다채롭다. 먼 데 능선은 울창한 숲인데 큰 나무 아래에 갖가지 꽃, 하늘을 날아가는 새와 땅을 헤집고 다니는 벌레. 따사로운 햇볕과 어두운 그늘, 산들바람과 쏟아지는 비가 있는 것처럼. 거기에 더하여 우리는 고국을 떠나온 디아스포라로서 한 생(生)을 살아왔기에 더욱 풍성하다. 자전 수필은 한마디로 ‘자기 고백’이다. 자신만의 경험과 의식을 글로 드러내는 이 작업은 단순히 기억으로 경험 세계를 회상하며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의 현재 관점에서 과거 경험을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창조의 과정이다. 현재의 자아가 과거의 어떤 경험 속 자아에 다가가 몸과 마음에 각인된 기억을 어루만지며 울고 웃는 일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화해하고 현재의 나를 치유한다. 내가 나를 용서하고 껴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자손에게 그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려줄 수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다음 세대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유산이 될 것이다. 일반적인 자서전이 기술하는 역사의 대상은 영웅이거나 특별한 위인이지만 우리가 쓰는 자전 수필은 평범한 사람이 살아온 보통의 삶이다. 수필 공부 그룹의 글은 지금 고등학교 시절까지 나아갔다. 이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영웅이 되어있지 않을까.

<성민희 수필 평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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