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시대의 수필  

 

석현수 

 

 

 

 

어딜 가도 자연산을 보기 어렵다는 말 한마디로 입방아에 올라 애를 먹은 사람이 있었다. 툭하면 뜯어고치고 갖다 붙이니 모든 얼굴이 비슷비슷해져 미인의 기준도 흔들릴 판이다. 그는 성형 세태를 잘못 꼬집다 여성 비하라는 덫에 걸려 사과도 하고 여론의 매를 모질게 맞았다.  어느 유명 정치인의 설화舌禍였다.

 

글쓰기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다. 한 해의 총결산인 신춘문예의 작품들을 보아도 그 글이 그 글이어서 정형이나 한 듯 엇비슷하다. 길이가 긴 수필에는 시詩보다 더욱 그러해서 제목만 봐도 이야기의 얼개를 짐작하게 된다. 대부분 주제가 가정家庭이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정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심사자의 심사 경향이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글들을 선호하니 자연히 여성스럽고 맛이 감치는 모양으로 꾸미고 나오지 않을 수 없으리라.     

 

먼저 수필 경향에 대한 획일적인 성형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수필을 경硬 수필과 경輕 수필로 구분하고 있다. 서구의 것은 대부분 딱딱한 경硬 수필에 속하지만, 지금 우리의 글쓰기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경輕 수필이 주를 이룬다. 경硬 수필은 주제가 무겁고 좀 어렵게 풀어간다고 하여 중重 수필이라고 부르며 우리 눈에 착 달라붙는 사근사근한 맛이 덜하다. 애써 자료를 뒤적이고 논리를 세워가며 쓰면 뭣 하나 반기는 사람도 없을 텐데, 하고 등을 돌리고 있다.    

 

자꾸 경輕 수필만을 고집하다 보니 중수필은 수필이 아닌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다. 수필이란 쓰기도 편하고 읽기도 편한 각자의 마음의 글로 정의를 내리고서는 대개가 일상의 자잘한 주제들을 글감으로 삼아 글을 쓰고 있다. 독자들도 복잡한 것보다는 인스턴트식품같이 맛으로, 눈으로 먼저 들어오는 글에 더 주목한다. 작가는 독자와 더불어 그들의 기호를 따라나서게 되고 일제히 가벼운 경수필로 성형을 해서 글들을 내보낸다. 문화란 유행이며 경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한국 문단에서 유독 심한 것이 아닐까 싶다. 글이 한쪽으로만 쏠리지 않고 중重과 경輕이 같이 아우러지도록 양자에 대한 인식과 대접을 대등하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남의 글 가져다 도배하는 성형 방법이다. 혼자 베틀을 놓고 비단을 짜서 어느 천년에 적삼 한 벌 만들 것인가? 고생 글쓰기보다는 인용이라는 핑계로 오히려 남의 글을 가져다 쓰는 것이 편하고 때론 그것도 모자라 근거 있는 글들도 뿌리를 잘라 자기 글에 꺾꽂이하거나 접붙이기를 해낸다. 그러다 보니 내 글이 네 글이 되고, 네 글이 또한 내 글이 되는, 촌수가 가까운 글들이 많아져 작가 고유의 피땀이 서린 완벽한 자연산을 실로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글에서 불법 성형이 너무 횡횡하고 있다. 순수한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한 작품 속에 얼마만 한 분량이나 될까?     

 

글쓴이의 얼굴도 보이지 않고 고뇌의 흔적도 없는, 순도가 약한 것들을 두고 아무개의 글이라고 이름 석 자를 붙이는 일은 강심장이 하는 일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빚어내는 ‘CTL+C’와 ‘CTL+V’로 짜낸 부실한 직물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지. 열심히 일한 개미가 노래하는 베짱이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문화 콘텐츠 시대에 살고 있어 재주껏 시류를 타고 무엇이든 잡히는 대로 자기화를 꾀하는 작법이 유행한다. 글은 곧 글쓴이의 얼굴이라기보다는 글은 곧 작가의 손재주라고 고쳐 불러야 할 때가 조만간 올 것 같은 우려를 한다.     

 

고려시대의 명문장 이규보 선생은 그의 글쓰기 지도에서 옛사람들의 말을 너무 많이 들먹거리지 말기를 권고한다. 그런 글은 문장 속에서 송장 냄새가 난다고 혹평을 했다. 자기 얼굴을 보이라는 충고다. 독자는 저자의 손맛을 보려고 하기보다는 민 살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적어도 수필에서만큼은 글이 곧 글쓴이의 얼굴이 되어야 하기에 성형으로 아름다워진 것들보다는 정직한 자연산 글들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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