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 대로’의 향수 

 

석현수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이 말만큼 많이 들어 본 것이 없다. 좋은 뜻에서가 아니라 이것이 틀렸다는 전제하에 글 쓰는 이들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이어서 목소리도 높았고 표현도 거칠어 귀에 못이 박혀있다. 이젠 안심하여도 좋다. 사람도 가고, 세월도 갔기에 지금은 아무도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말은 이미 죽은 말〔言〕이다. 죽은 말〔馬을 두들겨 패기란 부질없는 일이다.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했던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모두들 우리가 배웠던 국정교과서의 금아 피천득 선생의 ‘수필’이란 글제를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글속에는 수필을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의미의 문장이라면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라는 말이 있을 뿐 ‘붓 가는 대로’는 금아의 ‘수필’에서 인용된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김광섭의 1934년 김광섭의 <수필문학 소고>에서 나온 말이다.  

 

 

‘붓 가는 대로’의 정의는 금아의 동시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떠들었을, 수필에 대한 일반적인 한자 풀이였을 것이다. 수필隨筆의 한자를 따를 수, 붓 필로 본다면야 이것도 무리가 있었던 말은 아닐 성싶다. 오늘날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써서는 절대로 안 된다 것이 보편화된 것처럼, 당시의 ‘붓 가는 대로’가 중론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된다.’라는 말도 ‘안 된다.’라는 말도 양쪽 모두 근거가 빈약하긴 마찬가지여서 특정인물 하나를 희생양으로 삼고자 자꾸 두리번거리는 것은 의미 없는 마녀사냥일 터이니 ‘누가’라는 시비는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붓 가는 대로’ 앞에다 ‘아무렇게나’ ‘마구 쓴’이란 말을 의도적으로 붙여 나쁜 이미지를 더 극명하게 보이도록 노력했던 사람들 덕분에 해를 거듭할수록 ‘붓 가는 대로’는 당치도 않은 말이 되어 버렸고 수필 입문에 제일 먼저 들어야 하는 금기사항이 되었다. 이론서마다, 수필가마다 이구동성으로 잘못된 말이라 의견을 통일해 놓고 보니 지금에는 ‘붓 가는 대로’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니 수필 계를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수필이 주변 문학에 머물러야 했던 가장 큰 이유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수필의 정의 때문이라며 ‘붓 가는 대로’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그렇다면 수필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붓 가는 대로’가 없어진 지금에는 수필이 문학의 중심으로 이동하였는가? 그렇다면 지금쯤은 우수한 명수필들이 넘쳐 나야 할 때도 되지 않나 싶은데 그런 기미는 보이고 있기나 하는가? 혹시 우리가 내렸던 수필에 대한 진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의구심마저 든다.  

 

 

‘아무렇게나’ ‘마구’ 등의 자의적인 꾸밈말을 붙여 놓은 친절에 대해서는 필자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소위 글을 쓰는 사람이 어떻게 ‘아무렇게나’ ‘마구’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어느 장르에서 간에 글을 써 본 분이면 이런 작법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수필이 하나의 작품일진대 이것이 그렇게 쉽게 쓰일 문학이 아니다. 마치도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라는 코치의 말을, 시합을 연습처럼 ‘성의 없이’ 하라는 말로 와전시켜 코치를 매도하려 드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수필에서의 ‘붓 가는 대로’란 붓 가듯이 흘러 자연스럽게 표현해 보라는 전문가들의 당부 말이 아니겠는가 싶다. ‘힘들게 써서 쉽게 읽혀야 한다.’라고 하는 다른 말일 것이다. 

 

 

잘 쓴 글씨를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고 한다. 모래 위에 사뿐히 앉는 기러기의 모습을 이르는 말이다. 새가 가장 위험한 순간은 솟구쳐 날아오르는 순간이 아니라 땅으로 내려앉는 순간이다. 날개에다 바람의 항력을 잔뜩 받아내려고 다리와 고개를 한껏 앞으로 내밀고 있다. 무게 중심을 잡는 무척 긴장된 순간이다. 물론 눈도 깜빡거릴 여유도 갖지 못하는 긴장감으로 새는 모래사장에 내려앉는다. 새들은 얼마나 착륙하는 연습을 많이 했으면 이 위험천만의 순간을 사람들의 눈에 사뿐히 모래사장에 앉듯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었을까?  

 

 

수필이 그러하다. 그동안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겨 주었던 수필 계의 원로들의 글들은 얼마나 자연스러우면서 깊이 있는 수필들이었던가. 이들 수필의 공통점이란 ‘자연스러움’이다. 이들이 지향하고자 했던 것이 ‘붓 가는 대로’였다면 지금 우리는 왜 ‘붓 가는 대로’가 아니어야 하는가? 이런 글 뒤에 숨어 있을 글쓰기의 깊은 고행의 길을 이해하지 못해서일까? 명수필로 추앙받고 읽히고 있는 것들은 모두 글들의 자연스러움 덕분이리라 생각한다. 

 

 

수필의 기원을 당송 시대의 홍매(호는 용재)라는 사람의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찾았다면 지금의 수필은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았다. 수필이 복잡하고 어려운 형태의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다. 독자는커녕 수필을 좀 쓰네 하는 사람끼리도 애써 땀을 흘려가며 이해를 돋우어야 할 만큼 고급화(?)가 이루어진다. 필자는 요즈음의 수필을 일러 『분재수필盆栽隨筆』이란 새로운 용어로 모셔주고 싶다. 철삿줄로 이리저리 비틀어가며 의도된 특정 형태의 모습을 갖춰가는 분재 가꾸기 같은 모습이 생각나서다.  

    

 

수필隨筆이란 <隨 : 따를 수, 筆 : 붓 필 >이라는 한자 풀이가 새삼 그립다. 언제가 나도 명수필 작가들처럼 붓 가는 대로 써 보았으면 하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붓 가는 대로’에 대한 진의는 ‘아무렇게나’에 있지 않고 ‘자연스러움’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갈 길이 까마득하다. 사뿐히 앉는 기러기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추사 선생은 천 개의 붓을 닳게 하고 열 개의 벼루를 구멍 내었다고 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글을 쓰고 또 버려야 한단 말인가? ‘붓 가는 대로’는 더는 시비할 필요조차 없는 죽은 말〔言〕이기보다는 내가 타고 날아야 할 천마天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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