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싸움에 새우 등 안 터지려면/신병주


지금부터 400년 전인 1619년 2월1일. 광해군의 지시를 받은 도원수 강홍립이 조선군 선발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명나라의 요청에 의해 후금을 협공하는 작전에 조선군 병력이 투입된 것이다. <광해군일기>에는 그날의 상황이 기록돼 있다.


“신(강홍립)이 삼영(三營)에 전령하여 우선 우영(右營) 포수 2000명, 좌영(左營) 포수 1500명, 중영(中營) 포수 1500명을 뽑아 5000명을 채워서 지금 들여보내려고 합니다. 부원수 김경서로 하여금 군졸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게 했고, 내지에 머무르는 군대도 대열을 지어 차례로 이동해 강변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동북아시아 정세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명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동북지역에서 그 세력을 확대한 여진족은 누르하치가 1616년 부족을 통일했다. 국호를 후금(後)이라 하고, 중원 진출을 목표로 명나라를 압박해나갔다. 다급해진 명나라는 조선에 군대 파병을 요청했고, 광해군은 고심이 커졌다. 임진왜란 때 왕세자로서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던 광해군은 명나라의 약해진 국력과 더불어 신흥 강국으로 성장하는 후금의 힘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우방국인 명의 파병 요청을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명은 임진왜란 때 위기에 빠진 조선을 위해 대대적인 병력을 파병해준 ‘은혜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명의 거듭된 파병 요청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후금과의 외교채널도 가동시킨다. 그리고 왕의 통역관으로 신임이 두터웠던 강홍립에게 파병군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도원수 직책을 부여했다. 비밀리에 전투 상황을 봐서 후금에 투항해도 좋다는 밀지(密旨)도 내렸다. 1619년 3월3일 후금의 군대를 만난 강홍립은 큰 전투 없이 먼저 후금 진영에 투항의 뜻을 전했다. ‘후금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광해군의 의중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3월5일 강홍립은 후금의 지휘본부가 있는 흥경으로 들어가 누르하치를 만났으며, 그 자신도 바로 억류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않고 오랑캐에 바로 항복한 강홍립과 가족을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광해군은 끝내 그의 가족을 보호해줬다. 조선과 평화관계를 맺은 후금은 조선 침공을 하지 않고 명나라 공격에 전념했다. 결과적으로 광해군 시대에는 전쟁이라는 상황을 피해갈 수 있었다.

후금과의 일촉즉발의 위기 극복에는 냉철하게 현실을 인식한 광해군의 외교적 안목이 큰 몫을 했던 것이다.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키고 광해군을 축출한 서인 세력은 강홍립을 ‘강오랑캐’라 칭하며 최대의 모욕을 안겨줬지만, 후금 투항 이후에도 강홍립은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홍립은 후금 군대의 일원으로 조선에 들어왔으나 조선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해 화의(和議)를 맺는 데 기여했다.

광해군은 즉위 초 대동법 실시나 <동의보감> 간행 등의 정책을 펼치면서 전란의 후유증 수습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왕통 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어린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시킨 ‘폐모살제(廢母殺弟)’와 무리한 궁궐 조성사업으로 말미암아 반대 세력을 결집시키는 빌미를 주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완전히 바뀌면서, 광해군 시대의 모든 것은 철저히 부정되는 ‘적폐(積弊)’가 됐다.

인조반정 후 외교정책도 완전히 바뀌었다. 인조와 서인들은 다시 ‘친명배금(親明排)’ 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한때의 우방국인 후금을 크게 자극하게 됐다.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은 외교적 실패가 낳은 대재앙이었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조(祖)’와 ‘종(宗)’으로 칭해지는 조선의 다른 왕들과는 달리 ‘군(君)’이라는 왕자 시절의 호칭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연산군이야 검증된 폭군이므로 그리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광해군의 경우는 그 빛과 그림자가 함께 조명돼야 할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의 압박이 날로 거세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도 광해군이 보여준 유연하고 능동적인 실리외교는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