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형 남편과 B형 아내 / 김민지
혈액형에 따른 성격분류는 바넘 이펙트(Bamum Effect)일 뿐이라고 믿고 있다. 이 효과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을 자신만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이다. 요즘 인기 있는 유머나 정보를 보면 혈액형에 대한 것이 많다. 서점가에서도 혈액형별 학습법, 자녀양육, 식단 차리기, 목욕법, 연애하기 같은 책이 눈에 띠는 것을 보면 살아가면서 매우 유용한 정보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살아있는 생명체의 몸속에 뜨겁게 흐르는 것이기에 어찌 그렇지 않을까.
혈액형은 우리 집에서도 모든 사건의 시작이자 결말이다. 내가 현실을 잘 알지 못하고 혼자만의 상상으로 무턱대고 일을 벌이는 돈키호테형이라면, 남편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고민이 많아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햄릿형이다. 그래서 우린 가끔 서로를 보며 도무지 알 수 없는 외계인 대하듯 할 때가 있다.
A형인 남편은 한결같이 성실하며 질서정연하데다 깔끔하다. 매사 일처리가 고르고, 소심하다. 변화보다는 유지를, 개혁보다 보수를 선호한다. 다른 사람에게 신세지기 싫어하고, 다른 사람이 방해하는 것도 싫어해서 자신에게 엄격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역할-여자다움, 남자다움, 자식다움, 부모다움에 대한 판단이 정확하다. 또 남편은 감성적이고 자상하다. 작은 화병에 계절 꽃을 사다 꽂거나 TV를 보면서 건강수칙이나 맛깔난 반찬 레시피를 적어주는 것도 남편이다.
반면 B형인 나는 어떠한가. 자기 주관이 강하고, 싫고 좋은 것이 이성보다는 기분에 따라 변한다. 기분파에다 변덕쟁이로 싫증도 잘 낸다. 좋아하는 일에는 집중력이 높지만 관심이 없으면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호기심이 많아 바깥일에 관심이 많은데 한 가지에 열정을 쏟기보단 여러 가지 일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남편에게 나는 늘 철없고 유치하고 어리광 많은 사람으로 핀잔을 듣기 일쑤다. 성격이 급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면 차분해 진다지만 나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일까? 여전히 덤벙거리니 말이다. 그래도 젊게 살고 싶어 하고 스피노자의 말처럼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낙천적인 생각을 하며 산다.
그런 우리 부부를 보고 막내딸아이가 말한다.
“아빠는 대문자 A형이고 엄만 대문자 B형이야.”
맞는 말이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로 비유한다면 남편은 ‘콩쥐’고 나는 ‘팥쥐’다. 나는 콩쥐나 흥부보다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에 가깝다.
그러나 티격태격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백화점에 갔다가 예상치도 않은 고가의 물건을 덜컥 사들고 올 때, 신중히 문서를 다룰 일에도 호기를 부릴 때, 식당에서 나온 맛난 반찬을 나 혼자 다 먹어버렸을 때, 남편이 쓰고 있는 화장실로 황급히 뛰어 들어갔을 때, 남은 식재료를 모두 섞어 반찬을 만들었을 때 남편은 난감한 표정을 보인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표정도 그랬다. 그뿐이랴. 관공서나 은행에서 잊고 나오는 내 물건은 언제나 남편 손에 들려있다.
“어찌, 그런 부인을 두었소.” 하고 남편을 위로 한다면 A형도 녹녹하지는 않다. 물건 하나를 사려면 수십 번을 만져보고 따져보고 그래도 집에 돌아와 예산을 짜야 살 수 있고, ‘허허허’ 하고 웃어주면 될 일에도 조목조목 따진다. 음식에 재료가 들어가는 순서도 지켜야 하고 먹는 모양새며 신발장에 신발을 벗어놓는 것도 가지런하고 깔끔해야 한다. 내가 어쩌다 재미삼아 ‘로또’를 사오면 혀를 찬다.
그동안 어찌 살았냐고? 여성적이며 소심하고 내성적인 A형 남성과 남성적이며 대범하고 외향적인 B형 여성의 조화, 참으로 만물이 신비롭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해와 달, 음지와 양지, 동과 서, 남과 북, 움직임과 고요함. 남편은 참 애석한 일이라지만 A형은 B형이 있어야 빛이 나고, B형은 A형으로 인해 빛이 난다. 서로의 피가 섞이면 혈구덩어리를 만들어 죽음에 이를진 모르지만, 마음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정을 섞어가는 일이 우리부부의 삶이 아닌가 한다.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여성스럽지 않은 아내 때문에 서운하고 섭섭한 남편이지만, 법정스님의 말처럼 부부한 거문고 줄처럼 가지런해서 한가락에 같이 울릴 수 있어야 하며 서로가 소유를 하거나 당하지 않게 때문에 조화가 깨어지지 않는 것이다.
삼십 년을 넘긴 부부는 혈액도 묽어지는가. 서로에게 A형이 되고 B형이 되어 산다.
그런대도 딸아이가 좋아하는 청년이 있다는 말에 나는 대뜸 “혈액형이 뭐니?”하고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