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탕, 그 이름만으로도 / 허정진 - 2024년 신격호 샤롯데 문학상 최우수상
허연 날을 세운 쇠도끼가 하늘 높이 솟구친다. 온몸에 힘을 끌어모아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내려치는 도끼날에 매섭고 날카로운 파동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도끼가 날아올 때마다 그 육중한 타격감에 질끈 눈을 감는다. “퍽”“퍽” 나무가 갈라지는 파열음과 함께 지축을 흔드는 충격력이 고스란히 모탕으로 전달된다. 의연한 묵언으로 받아내는 것 같지만 순간순간이 아프고 두렵다. 그때마다 수없이 흔들리고 까무러치고, 운명이라면 차라리 숙명으로 여기며 혼신의 힘을 다해 버티어 낸다.
오래전 산중 농막에서 몇 해를 보낼 때가 있었다. 겨울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온돌 난방을 해야만 했다. 방고래를 향해 훨훨 타오르는 장작불에 불멍의 멋과 낭만도 있었지만, 따뜻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여름부터 틈틈이 땔감을 준비해 두어야 했다. 산에서 풍락목을 옮겨와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도끼로 패서 불땀 좋은 장작으로 만드는 과정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요령도 재주도 없어 처음에는 힘들기도 했지만, 처마 밑에 그득 쌓여가는 장작더미를 보면 곳간에 곡식 마냥 마음부터 넉넉해졌다.
나무를 패거나 자르고 쪼갤 때 밑에 받쳐놓은 통나무 받침대를 모탕이라고 한다. 주로 단단한 참나무나 밤나무 절단목을 사용한다. 굵은 나무 둥치는 그냥 맨바닥에 세워놓고 도끼로 패기도 하지만, 작은 나뭇가지나 장작을 가로로 눕혀놓고 자를 때는 모탕이 필요하다. 받침대가 없으면 나대나 도끼날이 바닥에 부딪혀 이가 나가기도 하고 흙에 쇠가 부식되기도 쉽다. 무용지용(無用之用)처럼, 쓸모없는 듯 보이지만 실은 없어서는 안 될 유용한 역할이다.
새들은 가벼워야 하늘을 날고, 범종은 속을 비워야 멀리 울려 퍼지지만 모탕은 오히려 무겁고 단단해야 한다. 장소나 용도에 따라 크기와 높이를 달리해도 무엇보다 내 속이 꽉 차야 남을 받쳐줄 수도 있다. 내려치는 힘만큼 버텨서 균형을 잡아야 하고, 함부로 뒤집히는 일이 없도록 무게중심을 유지해야 한다. 정확한 방향과 타격으로 안전한 도끼질을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낮아지는 방법밖에 없다.
매일 도끼에 맞으면서도 도끼날을 보호해야 하는 모순이 당혹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속성은 고난 앞에서도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 모든 상처를 제 속으로 끌어안는 인고(忍苦)의 길이다. 단단한 근육질과 선의의 신념, 심지 굳은 사명감으로 무장한 영웅이라도 만난 것 같다. 권투선수가 상대의 펀치를 견뎌내기 위해 맷집을 키우는 것처럼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눈이 오면 눈에 얼기를 참아내며 자신의 근력을 키운다.
날개를 펴고 비상을 꿈꾸거나 편하고 안전한 곳으로 이탈을 시도해 본 적 없다.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야 한다, 항변도 없고 주장도 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는다. 방하착(放下著)이 빚어낸 오도송 같은 한 덩어리의 침묵이 자신의 유일한 응답이다. 낮은 곳에 머물며 세상의 무게를 떠받치는 집의 주춧돌이고 돌탑의 밑돌과 다름없다. 맨바닥에 온몸을 지탱한 채 아무런 저항도, 거부도 없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힘들고 지친 날은 지난 기억을 되돌아볼 때도 있다. 구름과 하늘을 바라보고, 새와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며 숲속에 큰 나무로 자라던 오래된 시간이 있었다. 마음도 평화롭고 영혼도 자유로운 날들이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사람들이 산을 개간하기 위해 벌목을 하기 시작했다. 나무는 바닥에 넘어지고 오랜 시간 쌓아온 나이테도 거기서 멈췄다. 한그루로 같은 나무였던 몸체가 조각조각 나뉘어졌다. 굵고 곧은 재목은 집의 기둥이 되고, 무늬나 재질에 따라 갖가지 목물(木物)로 부활하기도 하였지만 볼품없는 밑둥치 부분은 결국 모탕이 되고 말았다.
도끼가 내려칠 때마다 살점이 뜯기어 나가고 뼈마디가 부서져 내린다. 몸뚱어리가 뒤틀리고 함몰되어 성한 곳이 없다. 얻어맞아야 돈을 버는 직업이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찰나의 순간이 새긴 도끼 자국들은 삶의 흔적인 나이테마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흉물스러운 몰골이 되어간다. 칼날을 받아주는 도마의 실금이나 난해한 상형문자 정도가 아니다. 거친 바위에 깊게 팬 암각화이고 퇴적층 같은 골 주름이다. 혹독하고 참혹하다.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몸뚱이가 패어져 나가 작아지거나 어쩌다 잘못 맞은 도끼에 장작처럼 쪼개지기라도 하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 힘든 삶이었지만 그나마 모탕으로 다시 생명을 얻었던 그 역할마저 끝나고 만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하나뿐이다. 이제 자신도 장작더미 일부가 되어 훨훨 불길이 타오르는 아궁이에 던져져 산화하는 일밖에 없다. 마지막 한줄기 불덩이로 구들장을 데우고서는 한 줌 나뭇재로 존재를 마치는 것이다.
누구에게 자신의 노고를 알아봐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노고에 누군가 고마워하거나 쉽게 대접해주는 일도 없다. 하늘의 새든 사람이든 자기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저녁에도 모탕은 홀로 마당 한편에 납작 엎드려 밤이슬을 맞는다. 때때로 생(生)에 쫓기는 듯 팔다리를 버르적거리며 자각몽에 시달리기도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모탕 같은 사람들을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모탕은 희생과 헌신의 결정체다. 몸과 마음,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온전히 내어준 상태로 뼛속까지 살신성인의 유전자를 타고 태어났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부모라는 존재와 의미에 충실한 모양이다. 갓 태어난 새끼들에게 제 몸을 먹히게 하는 거미나 가시고기, 자기 몸속에 새끼 기를 주머니 하나씩을 숨기고 사는 세상의 어미들은 태내에 공급할 영양소를 위해 평생 빈혈에 시달리며 산다. 달려오는 차를 자기 몸으로 막아설 사람, 자식을 위해 자기 목숨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의 생은 장엄하고 존귀하다.
아버지도 그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오직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자기희생의 숭고한 사랑을 베푸셨다. 집안에 큰소리가 나거나 회초리 한번 드는 일이 없이 언제 어디서든 든든한 버팀목으로 존재하는 조용한 힘이었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고 그 고뇌와 고독의 그림자를 뒤돌아보지 못한 불효가 뒤늦게 원망스럽다. 영원한 생명은 없다. 청보리밭에 종달새 우짖던 어느 봄날, 지난하고 외로웠던 모탕 같은 생을 마감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이별 뒤에야 비로소 뒷모습으로만 아버지를 읽으며 그리운 이름으로 불러보곤 한다.
고즈넉한 시골 마을 친구 집을 방문했다. 방금까지 장작을 패던 중이었는지 모탕 위에 도끼자루가 사선을 그으며 꽂혀있다. 기울어 가는 햇살에 그늘 한점이 모탕에 드리워졌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