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고구마 / 목성균
내가 강릉 영림서 진부 관리소 말단 직원일 때 월급이 칠천몇 백 원이었다. 그 돈으로 어린애 둘과 아내와 내가 한 달을 빠듯하게 살았다. 어떤 때는 아내가 담배를 외상으로 사다 줄 정도였다. 새댁이 담뱃갑을 건네주면서 조심스럽게 신랑한테 하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담배는 외상 주는 게 아니래, 자기 담배 못 끊지?”
늘 퇴근이 늦었다. 잔무가 있어서 늦을 때도 있었지만 잔무가 없어서 늦는 때도 많았다. 잔무가 없으면 미뤄두었던 고스톱 화투를 쳐야 하기 때문이다. 직원들 간에 숙직실에서 화투를 치는 것은 동료애를 돈독히 하는 것이지 절대로 노름은 아니다.
특히 산읍이 눈 속에 깊이 묻히는 겨울에 그랬다. 어두워져서 전등에 스위치를 넣으면 늙은 소장님은 큰 곰처럼 어정어정 소장실을 나갔다. 보나 마나 면장님 사택이거나 지서장님의 하숙집으로 마작하러 가는 것이다. 우리는 눈을 맞추고 사무실 뒤 숙직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 사환은 알아서 관리소 앞에 있는 ‘삼척 집’에 직원들이 숙직실에서 고스톱 화투를 친다고 이르고 퇴근을 했다.
밤이 이슥해서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고 오는 소리가 숙직실 앞에 와서 멎으면 문이 벌컥 열렸다. ‘삼척 집’ 늙은 아주머니였다. 머리에 이고 온 도토리묵과 찌개와 막걸리 주전자가 담긴 함지박을 숙직실 안에 들여놓으며 볼멘소리를 질렀다.
“색시들 기다려, 먹고 그만 집에 가-.”
마치 자기가 직원들의 장모님이라도 되는 양 성미를 부렸다. 그러면 고스톱 판은 끝났다. 직원들은 밤참과 막걸리로 배를 채우고 만족해서 “크-윽-.” 트림을 하면서 숙직실을 나섰다. 지금도 가끔 행복한 포만감을 느낄 때면 그때처럼 생리적인 소리를 일부러 내본다. 그러면 한결 행복하다.
숙직실을 나서면 흰 눈이 소복한 부피를 지으며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나의 집은 읍내 밖 진부 농고 뒤에 있는 농가의 바깥채였다. 버스정거장 앞을 지나서 논둑길을 건너가야 했다. 아내가 어두워지면 윗방에 있는 전등을 내다가 추녀 밑에 걸어 놓고 불을 밝혀놓았다. 나는 그 전등 불빛을 등댓불처럼 의지하고 어두운 논배미를 건너서 집에 가곤 했다. 그러나 그 전등은 따뜻하게 내 삶을 고무해 주는 정도지 삶의 길잡이 역할까지는 못했다. 적설에 묻힌 논배미에는 도대체 어디가 논바닥인지, 논둑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그 불빛은 논배미의 적설 상태까지 밝혀 주진 못했다. 다만 ‘빨리 오세요.’ 하는 아내의 눈짓에 불과했다. 논둑을 더듬어 가다가 실족하면 논둑 아래 적설 속에 빠지고 말았다.
버스정거장 모퉁이에는 소아마비를 앓아서 수족을 잘 못 쓰는 아주머니가 군고구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눈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작은 산읍 모퉁이, 내가 집에 돌아오는 그 늦은 시간에는 군고구마가 팔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아주머니는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서 있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 앞을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서 늘 몇 알의 고구마를 샀다. 그해 겨울 나의 하루 일과의 마지막은 그 아주머니에게 군고구마 몇 알을 사는 일로 끝나는 셈이었다. 늦은 밤 그 군고구마를 가지고 가서 깜박깜박 졸면서 신랑을 기다리던 새댁에게 불쑥 내밀면 참 좋아했다. 그 재미에 몇 알의 군고구마를 사들고 갔다.
군고구마를 사서 잠바 앞섶에 넣으면 온몸이 따뜻했다. 논둑에서 떨어져 눈 속에 빠져도 춥지 않았다. 따뜻한 고구마를 품어서 그런지 눈 속이 아늑했다. 넘어진 자리에서 쉬어간다는 말처럼 나는 눈 속에 빠져서 잠시 동안 그대로 있었다. 고구마의 온기도 따뜻하고, 논배미 건너 내 셋집 추녀 밑에 걸린 분홍색 백열등 불빛도 따뜻하고, 내 마음도 따뜻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밤이 늦었다. 차라리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은 푹한데 눈이 오고 난 뒤 갠 날 밤은 숨을 못 쉴 지경으로 냉기가 혹독했다. 산맥들도 칼날처럼 등성이를 세우고, 별들도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날은 고스톱 화투를 해서 돈도 좀 땄다. 숙직실을 나서자 볼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잠바 속에다 자라목처럼 얼굴을 묻고 종종걸음을 쳤다. 고구마도 몇 알 더 사고 아주머니에게 개평을 몇 푼 줄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버스정거장 모퉁이까지 왔다. 그런데 아주머니 대신 웬 어린 소년이 서 있는 것이었다.
“너 누구냐?”
“영림서 아저씨이에요?”
“그래-.”
“일찍 좀 다니세요.”
처음 보는 녀석이 볼이 부어 가지고 감정적으로 그러는 것이었다.
“임마. 내가 일찍 다니든 늦게 다니든 네가 무슨 참견이야-.”
“아저씨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감기 걸렸으니까 그렇죠.”
그 녀석이 군고구마 장수 아주머니 아들인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늘 그래요. 영림서 아저씨 퇴근이 늦어서 늦었다고요.”
그때 내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내가 그 수족이 불편한 아주머니에게 고구마 몇 알을 사는 것은 내 행복을 위한 것이지 그 아주머니 장사시켜 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고구마 봉지를 가슴에 품고 발간 전등 불빛을 지향해서 눈 쌓인 논배미를 건너가면서 나는 늘 행복했다. 먼바다에 나갔다가 포구의 등댓불을 지향하고 돌아오는 작은 만선 어부의 마음이 그럴까. 그 행복감은 따뜻한 고구마 봉지를 가슴에 안음으로써 비롯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 아니었다.
그 수족이 불편한 아주머니는 나의 이 행복감에 차질을 주지 않으려고 고구마가 안 팔리는 그 추운 겨울밤에도 몇 시간씩 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다.
소년은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늘 사 가지고 가는 그 몇 알의 고구마를 가슴에 안겨주고, 군고구마 화로가 실린 리어카를 끌고 휭하니 거리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군 고구마값 받는 것도 잊어버리고 갔다.
그 소년은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내가 사 가지고 갈 그 몇 알의 고구마 온기를 혹한 속에 몇 시간 동안 떨고 서서 지켰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 대한 저의 어머니의 친절이 얼마나 가당찮은 것인가를 발견하고 화가 났을 것이다.
다행히 그 아주머니는 바로 감기를 털고 고구마 장사를 했다. 나는 고스톱 화투를 치면서 아주머니를 거리 모퉁이에 세워 놓지는 않았다. 일찍 그 아주머니 앞을 지나갔다. 일찍 집에 들어가는 것이 늦은 밤에 군고구마를 안고 들어가서 조는 아내를 기쁘게 해주는 것만치 재미는 없었지만 아주머니가 고생할 생각을 하면 도리가 없었다.
장중한 태백산맥에 둘러싸인 작은 산읍의 겨울밤, 칠천몇백 원짜리 말단 공무원을 행복하게 해준 아주머니의 행복한 고구마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