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 / 허정진

 

 

직장생활을 하던 젊은 시절에는 늦은 밤 귀가하는 날이 많았다. 회사 일이 늦거나, 동료와 술 한잔하느라 부랴부랴 막차를 타곤 했다. 막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어딘가 서로 닮아있었다. 고개를 숙였거나 초점 없는 표정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거나, 하나같이 피로에 지치고 어딘지 모르게 삶의 쓸쓸함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막차라는 심리적 배경이 밥벌이의 고단함이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더욱 부추기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보다 막차를 타야만 하는 생에 대한 애환과 번뇌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속울음을 삼키며 누군가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삶을 알려면 막차를 타보라는 말도 그래서일 것이다.

‘막차를 탄다.’라는 말이 있다. 뒤늦게 뛰어들거나 가까스로 기회를 잡는다는 뜻이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임계점에 다다라 그 경계선을 넘어서면 모래알처럼 손가락사이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생이다. 영원히 다른 길이 될 수도 있고 되돌아오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걸리기도 한다. 요행이나 운수소관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달린 일이다. 시와 때를 잘 맞추라는 경고다. 인생의 막차를 놓칠까 봐 하루하루를 덜컹거리며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산다는 게 늘 막차였다. 천성이 게으르고 의존적이지는 않았지만 세상과 절친하거나 영민하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늑장을 부린 꼴이었다. 세상과 나 사이에 분명 다툼과 혼선이 있었다. 그 다툼이 남보다 뛰어나다거나, 타협하지 못하는 개결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증적 불안, 자기 신념에 대한 결벽, 그런 나를 토해내지 못한 응어리가 매번 가슴속에서 와글거렸다. 그렇다고 세상을 외면할 용기는 없어서 잇속과 궁리 앞에 늘 쭈뼛거리기만 했다. 완숙하지도, 의젓하지도 못한 삶은 종이접기처럼 헐렁했다.

막차라는 풍경에는 적적함과 간절함이 깃들여 있다. 만남과 설렘이 첫차라면 이별이나 공허는 막차의 몫이다. 혼자 남겨진 그 자리에 외로운 영혼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고, 저마다 품고 사는 꼬깃꼬깃한 사연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올 것 같다. 남들은 일찌감치 퇴근해 휴식에 들거나, 어린 자식 옆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그 시간에 막차를 타고 가야 하는 사람들의 가슴에는 하나같이 한 무더기의 슬픔이 장전되어 있다.

막차가 떠난 뒤에는 하루치의 무대가 막을 내린다. 대합실에 불이 꺼지고, 구멍가게 셔터가 내려지고, 술에 취한 사내들의 노랫가락도 골목길로 사라진다. 빛과 공간이 멈추고, 소리와 냄새들이 잠든다. 시간은 곡선으로 흐르고, ‘빨리’란 말이 낯설어진 세상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느려진다.

언젠가 먼 지방에서 모임이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한잔하다가 뒤늦게서야 서울 가는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걷고, 뛰고, 택시를 타고 급히 달려갔는데 막차는 이미 저만큼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내일 회사 출근이야 까짓거 좀 늦어도 상관없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기분, 돌아가야 할 내 자리를 거부당한 것 같은 서러움이 왈칵 몰려왔다. 길가 수은등 아래 낯선 동네에 홀로 내팽개쳐진 것 같은 서글픔과 두려움이었다.

막차라도 타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다행이란 생각이 그때 들었다. 그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분명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천이자 안식처인 보금자리가 있다는 뜻이고, 살아가야 할 인생의 좌표를 잃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호화롭거나 고급스럽지 않아도 좋다. 내 목표가 남보다 대단하거나 멋지지 않아도 좋다. 내 몸과 마음이 편하고, 내 영혼이 자유롭고, 나의 삶에 내가 분명히 존재하는 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막차는 ‘마지막 차’의 줄임말이다. ‘마지막’이란 단어에서는 비장하면서도 운명적인 냄새가 난다. 어느 가을 자작나무의 마지막 낙엽, 낡은 지갑에 남은 마지막 밥값, 시간을 다 써버리고 남은 마지막 달력 같은 허전함이다. 마지막 출근 뒤에 오는 은퇴의 서운함이고, 반은 웃고 반은 울며 떠나가던 그 사람에게 마지막 할 말을 놓쳐버린 아쉬움이다. “힘이 없어.”라며 아버지가 임종 시 마지막 남긴 말은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세상에 많이 남았다는 생의 간절함이었다.

그렇다고 막차가 삶과 죽음처럼 마지막은 아니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 분절된 시간이 지나면 이제 막차가 아니라 첫차가 된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그믐이 지나면 보름달이 떠오르듯이, 십이간지 순서처럼 순환적이고 원형적인 시간일 뿐이다. 첫차가 있기에 막차도 있고, 막차가 있기에 첫차도 있는 것이다. 막차이었을 뿐이지 바닥으로 추락한 것도 아니고, 인생에 실패한 것도 아니다. 다만 오늘 조금 늦었기에 내일 그만큼 일찍 달려가면 그만이다.

가족의 목숨줄이 달린 일에는 낮과 밤이 없는 법, 그렇게 막차를 타고 늦게까지 일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자식들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 이제 은퇴도 하고, 자가용도 있어서 예전처럼 막차를 타고 다닐 일은 없지만 때때로 그동안 걸어온 길에 대한 아릿한 슬픔과 아픔에 잠기기도 한다.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에 회한과 위로가 자꾸만 가슴 언저리를 스쳐 가는 것은 나도 이제 막차의 시간에 접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조바심이다.

막차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돌아가는 시간을 잠시 놓쳤을 뿐 돌아가는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밤하늘에 북두칠성을 따라 나그넷길을 가듯 조금 느리고 천천히 갈지언정 결코 삶을 허투루 사는 일은 앞으로도 없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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