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깍지의 시간 / 이혜경

 

 

편으로부터 문자 한 통이 날아온다. '중년에 조심해야 할 질환들'이라는 제목으로 문장이 몇 줄 뜬다. 중년의 나이에 남편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면 갑상선 질환, 남편과 달달한 커피가 마시고 싶다면 당뇨, 걷다가 남편 쪽으로 몸이 기운다면 관절염, 남편이 갑자기 멋있어 보이면 백내장, 남편을 보고 가슴이 떨린다면 부정맥을 의심해보란다. 혹시 나에게 해당 증상이 하나라도 있느냐고 묻는 말에 웃음이 빵 터진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려면 서로 눈에 콩깍지가 씌어야 한다. 콩깍지가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눈에서 나오는 스파크가 오래 간다. 나 또한 그런 단계를 거쳐서 사랑에 빠졌다. 남들 눈에 뻔히 보이는 단점도 그놈의 콩깍지 아래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듯이 단점은 건너뛰고 장점만 크게 보였다. 사 년의 연애 동안 눈에 붙은 콩깍지가 떨어지지 않은 덕분에 결혼까지 갈 수 있었다.

문제는 사랑의 콩깍지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너 없으면 못 살아'가 '너 때문에 못 살아'로 바뀌는 것이 결혼이라더니 세월이 지나면서 콩깍지의 행방이 묘연하다. 이제는 수시로 서로를 향해 "당신 변했어"와 "피장파장이다"를 돌림노래처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콩깍지의 법칙이 꼭 남녀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묵은 서랍을 정리하다가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내복 차림으로 배시시 웃고 있는 아기의 모습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맞아! 저렇게 사랑스러울 때가 있었지. 내 속으로 낳고 내 손으로 키운 아이가 맞는데 사진 속 모습이 너무 아득하고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산부인과에서 임신을 확인하던 날, 초음파 화면에 나오는 동그란 점 하나조차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말발굽 달리는 소리를 닮은 심장 소리를 확인했을 때 생명의 신비에 감격해 내 가슴도 덩달아 두근거렸다. 뱃속에 품고 있던 아이를 처음 만났던 날, 속싸개를 풀어서 손가락 발가락 개수가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작은 입을 벌려 하품만 해도 그저 신기했고 쌔근쌔근 숨소리가 그 어느 악기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들렸다. 하루하루 아이의 존재감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자식이라는 존재는 하늘에서 내려준 귀한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를 향한 콩깍지가 요즘은 많이 벗겨졌다. 머리가 굵어졌다는 티를 내며 부모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 모습에 한숨이 난다. 공부라도 열심히 하면 용서가 될 것 같은데 돈을 들여 학원에 보내 주었더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세상 불쌍한 얼굴을 하고 나간다. 맑은 눈망울로 꽃송이처럼 화사하게 웃던 얼굴에는 울긋불긋 여드름 꽃으로 덮여 대략 난감 상태다.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이 말대답할 때는 등에 스매싱을 날리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콩깍지가 벗겨진 것은 아이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안기더니 이제는 엄마의 얼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요목조목 지적하며 팩트 폭격을 한다. 엄마 음식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던 아이가 이제는 그 손가락으로 배달 맛집을 검색하느라 바쁘다.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나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는 걸 보면 아이 눈에 붙어 있던 콩깍지도 사라진 게 분명하다. 저도 눈이 있으니 친구들의 부모님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는 마음이 왜 없을까 싶다. 자고 일어나기만 해도 대견해하고, 우유 한 병을 비우기만 하도 예뻐하던 그 시절의 내가 아니듯 아이 또한 맹목적으로 엄마를 좋아하던 그 어린아이가 아닌 것을 어찌하겠는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웃다가 답 문자를 보낸다. "오늘따라 유난히 달달한 커피 한 잔 땡기는데, 당뇨일까? 커피 마신 후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부정맥이 오려나 보네. 가끔 남편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던데 백내장인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잘한다고 타박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눈치다.

사실은 요즘 들어 당이 오락가락하는지 조금만 피곤해도 달콤한 커피가 간절하다. 노안인지 백내장인지 핸드폰 글씨도 잘 안 보이고 눈이 침침하다.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리는 부정맥 증상은 오래전부터 달고 지냈다. 팩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습자지보다 얇은 콩깍지라 하더라도 아직 한 겹 남았다고 착각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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