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 빛 들다 / 허정진

 

한 평 남짓 서재에 손바닥만 한 들창이 하나 있다. 그 옛날, 창호지 문에 댄 유리 조각을 통해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것처럼 비밀스러운 눈길로 다가간다. 담장 너머 가지에 감꽃이 열리고, 옆집 마당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저 멀리 골목길에 아장아장 손자 걸음을 쫓아가는 노인의 굽은 등도 본다. 창은 작아도 세상은 넓다. 그 창문을 통해 사람과 계절과 경치를 빌려오고 그럴 때마다 삶의 길목과 순간들을 반추하며 상념에 빠져든다. ‘빌려온 풍경’이니 차경(借景)이다.

추사 김정희의 ‘소창다명사아구좌(小窓多明使我久坐)’라는 글귀가 있다. ‘작은 창문으로 많은 빛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있게 하는구나.’ 거실의 커다란 유리창을 활짝 열어볼까? 창밖에 머물던 아지랑이 햇살, 향기로운 꽃내음, 그늘 품은 바람, 유쾌한 새소리가 창턱을 넘어 안쪽 세상으로 넘나들 것이다. 벽으로 둘러싸여 켜켜이 묵은 도피와 가난한 마음들이 창문을 통해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창밖의 세상은 언제나 낯설었다. 궁금할 때마다 다가섰으나 여전히 바깥은 보이지 않는 간유리 같았고, 유리를 사이에 둔 키스처럼 단절된 창문이었다. 성에가 낀 창문은 바깥의 얼음 강 소리를 들썩이며 매번 슬픈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달빛인지 가로등인지 알 수 없는 희붐한 빛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뻗으며 밤새 뜬눈으로 응시한 적도 있었다. 유리 벽에 코를 박은 스푸트니크의 개가 떠올랐다.

반지하 방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사하라사막 마트마타의 지하 토굴집처럼 창이 없었다.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먹과녁 같은 초행길 가듯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지만 당장 내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세상살이란 내 계획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경우도 다반사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낭떠러지에 묶인 생은 차갑고 가파르기만 했다. 처음부터 주어진 업(業)과 습(習)인 듯 사막의 모래 장미를 꿈꾸며 메마른 삶을 걷고 또 걸어가야만 했다.

반지하인 그 방은 낮에도 형광등을 켜야 했다. 외부의 빛이라곤 벽 위쪽에 손바닥만 한 쪽창 하나뿐이었다. 통풍도, 채광으로도 별 의미가 없었다. 다만 안과 바깥의 경계를 알려주는 표시등, 그것마저 없다면 숨 쉴 수도 없는 아가미 같은 존재였었는지도 모른다. 지면과 가까이 붙어 있는 그 창은 골목에 지나다니는 자동차 타이어나, 사람도 무릎 아래 신발만 보일 만큼 낮았다. 창문이 작아 고개를 들이밀 수도 없어 주어진 것만 허용된 감금당한 공간 같았다.

바깥을 보기 위해 창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가끔은 희망의 빛줄기처럼 그 쪽창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작은 창마저 활짝 열지는 못했다. 먼바다 고기잡이배의 집어등인 양 창문 밖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까 봐 두려웠다. 열 수 없어 끝내 벽이 되어버린 창문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먹구름 같은 울음이 몰려올 때 쪽창으로 숨구멍 하나 열어 놓으면 그 작은 틈새 사이로 푸른 달빛이 흘러들었다.

내게 창(窓)이 필요하다며 늘 속으로 뇌까렸다. 커다란 창이 있는 집에 산다면 그 창은 투명유리로만 만들어서 방안에 앉아서도 온 세상이 다 보이도록 씨쓰루(see-through)하겠다고 꿈꾸었다. 그 창문에는 커튼이나 블라인드 따위로 벽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때로는 창틀에 걸터앉아 밤새 하모니카를 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높이에서 저 그리움 가득한 세상을 향해 멀리 활강하는 새가 되고 싶었다.

지금은 햇볕 잘 들어오는 큰 창문이 있는 집에서 산다. 먹고사는 문제는 언제나 지나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서럽고 불편했던 기억들이 트라우마처럼 잠재하는 모양인지 마음의 창문은 아직도 제대로 열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창을 활짝 열어 쇄서폭의(曬書曝衣)하지 못하고 햇볕도, 바람도 거부하며 묵은 곰팡내를 키우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행여 나는 창문 없는 방에 스스로 갇혀있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보이지 않는 쇠창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늦게 자신이 두렵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창일 것 같다. 창문이 작아서, 반지하에서 산다고 세상이 우울한 것이 아닐 것이다. 세상에 열리지 않는 창문은 없다. 창을 열지 않으려는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 청안시보다 백안시였다. 고집으로, 자존심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신으로 그 창문 바깥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문은 소통의 통로이다. 창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립된 세계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창을 통해 바깥 사물을 내 인식의 마당에 끌어 들어올 수 있고, 블로그처럼 나의 창을 통해 내 삶을 누군가에게 특정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캄캄한 밤길을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날개도 등불도 아니고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동무의 발걸음 소리다.’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작지만 내 창문에도 벌 나비가 날아들었으면 좋겠다.

바깥에서 들여다본 내 창은 등황빛이었으면 한다. 차가운 형광등이나 형형색색의 LED 불빛보다 방 모퉁이 키 큰 스탠드에 따뜻한 백열등 하나 켜두는 것이 좋겠다. 한겨울 창호지 너머 바느질하는 어머니와 앉은뱅이책상 앞에 연필을 쥐고 있는 어린아이의 등 그림자가 몰래 그립다.

<한국수필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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