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동굴을 찾아서 노혜숙

 

"동굴은 신의 음성을 듣는 곳이다."

한 철학 교수의 말이 나를 자극했다신은 인간을 가리키며신의 음성이란 바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라는 것이었다사람이 신이라니동굴과 신의 음성은 또 어떤 관계란 말인가.

호기심이 발동해서 선사시대에 그려진 알타미라와 라스코쇼베 동굴의 벽화를 영상으로 찾아보았다울퉁불퉁한 벽면을 이용해 그린 동물 그림은 풍부한 색채와 섬세한 세부묘사실물 같은 생동감으로 쓰리 디 영상 효과를 연출하고 있었다크로마뇽인들의 솜씨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미학적 완성도가 느껴졌다동굴 답사 후 피카소가 '모든 문명은 알타미라 이후 쇠퇴했다'라고 극찬한 것도 과언은 아니지 싶었다.

동굴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예언자들이 신의 계시를 받고 제사의식을 행하던 종교적 무대였다곰이 인간이 되고 신화적 존재가 된 신비의 장소이기도 했다플라톤의 동굴처럼 의미심장한 통찰력을 던져주는 상징적 동굴도 있었다하루 네댓 시간 영상을 통해 얻은 영감으로 세계를 스마트폰에 넣었다는 천재 스티브 잡스.. 그의 동굴은 철저하게 자신과 마주하는 내면의 동굴이었다그야말로 자기 안의 상징적 동굴의 가치를 잘 알았던 인물이었지 싶다이들은 모두 동굴이라는 자기 세계 속에서 확고하게 자기만의 길을 간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동굴의 중의적 의미를 탐색하다 잃어버린 내 안의 동굴을 찾아 나섰다나는 어머니의 자궁을 통해 세상에 왔다타원형의 공간좁은 통로혼자만의 세계자궁과 동굴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어머니의 자궁은 내 최초의 물리적 동굴인 셈이었다따뜻하고 아늑했으나 궁핍과 불안으로 그늘지기도 했을 자궁그때 나는 하나의 가능성하나의 세포에 지나지 않았다놀랍게 펼쳐지는 생명의 파노라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생성과 파괴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 자궁을 찢고 모태와 결별한 그때가 내 생애 가장 역동적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궁 밖의 세상은 내게 또 다른 의미의 거대한 동굴이었다그 동굴은 살벌한 투쟁의 장이었다죽을 때까지 시시포스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안주의 비결은 있었다기존의 동굴 법규에 길들여지면 되었다그틀이 전부라 믿고 살면 되었다시기와 우연이 우열을 가리던 낭만적 시절도 있었으나 자본주의가 득세하면서 유일신의 지위는 오로지 자본에게 돌아갔다영민한 자들은 더러 회의를 품기도 했으나 거대 동굴의 완강한 권력에 반역을 꾀하기는 쉽지 않았다.

거대 동굴의 불빛은 현란했다흐린 눈으로 한동안 세상의 허방을 헤매었다욕망주체열정사랑자본권력의 깃발이 제각각의 색깔로 난무했으나 내겐 그림자처럼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었다. 차라리 몽매하던 저 자궁의 안주가 그리울 때도 이었다눈은 동굴 밖을 갈망했으나 몸은 무지의 사슬을 끊지 못한 거대 동굴의 노예 상태였다.

나는 선천적으로 동굴성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다그러나 내면의 동굴 세계는 단단한 내공이 준비된 자들고립과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것이었다멀리서 동굴이 가져다줄 저 서늘하고 순수한 자유의 기쁨을 예상하며 몸을 떨기도 했지만 동굴에 입문하지는 못했다지천명의 고개를 넘어서야 나의 의존성에 그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여전히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모태회귀의 자세로 숙고했다타인의 인정을 갈망하는 수평적 동굴 파기만 계속한 탓에 수직으로 자신을 향해 파내려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자기 안의 동굴은 고독을 거름으로 존재의 뼈대를 만드는 공간이었다나는 고독이 발효되는 카오스의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관계의 금단 증상을 견디는 일은 고통이었다이전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의 욕구도 형리처럼 가혹했다한 인간의 내공은 고독을 어떻게 승화시키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었다.

영혼을 주눅들게 하는 타인의 시선권력의 허깨비와 싸우는 일도 두려웠다온갖 주장과 신념의 소음들로부터 자신의 소리가 왜곡되고 묻히는 것에 태만했다혁혁한 업적을 세우겠다고 발품을 팔지는 않았으나 그 경계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업적을 기준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저 거대 동굴의 야만성에 오래도록 포획되어 살았다자기 안의 별이 아니라 바깥타자에게서 별을 찾아 헤매었다.

먼 길을 돌아 다시 동굴에 드는 일은 아득했다별은 보이지 않고 폐허엔 적막이 가득했다자신과의 독대 속에서 질기게 맹아盲我를 뚫고 나아가는 시간을 보냈다눈을 감아야 보이는 빛귀를 닫아야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이순 고지에 이르러 겨우 만나는 '신의 음성', 내 안의 진짜 목소리그래폐허에 꽂는 깃발일지라도 오롯한 자기 생의 시작일 수 있다면 그로써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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