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 김남희

 

 

 

돌담으로 둘러싸인 골목길로 접어든다. 회색 돌담을 병풍 삼아 산수유의 붉은 빛이 도드라져 보인다. 찬 서리 겨울바람에도 빨갛게 매달려 있다.

시어머니는 군불을 지핀 사랑방에서 산수유를 말리곤 했다. 철 지난 달력을 펼쳐놓고는 씨를 뺀 핏물 같은 산수유를 매만졌다. 달력 한쪽에는 반쯤 건조된 산수유가, 다른 한쪽에는 씨를 막 도려낸 산수유들이 누워 있었다. 붉은 옷을 벗은 갈색 씨들은 거친 파도에도 끄떡없는 절벽처럼 단단했다. 몇십 년이 흘러야 흙으로 돌아갈까. 썩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픈 부위를 도려내는 능숙한 의사처럼 어머니의 손은 재바르고 날렵했다. 풀이 죽은 산수유 열매에서 씨와 피부를 갈라내는 일은 어머니에게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손은 이미 산수유의 흔적들로 뒤덮여 있었다. 저녁노을처럼 붉게 퍼졌다가 시간이 지나면 짙어지는 어둠처럼 어머니의 손도 노을빛에서 짙은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굵게 파인 굳은살 사이로 산수유물이 거세게 스며들어 있었다.

삐거덕거리는 대문 소리가 나자 어머니는 바람 소리인지 며느리가 오는 기척 소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산수유물이 든 검은 손으로 흰 창호지 빗살무늬 문고리를 힘껏 잡아당기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며느리를 반갑게 맞았다. 달력 위에 누워 제집처럼 차지하고 있는 산수유를 밀어내고 구들목으로 며느리를 당겨 앉혔다.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며느리는 시댁을 자주 오지 못했다. 직장까지 겸하고 있어서 주말이나 되어야 군위 한밤마을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그것도 지하철, 기차, 시내버스, 시외버스 등 바퀴 달린 모든 것들을 총동원하여 저녁나절이나 되어서야 시댁 문을 열었다. 그런 수고로움을 알기에 어머니는 산수유를 까며 이제나저제나 며느리를 기다리다가 구들목을 차지한 산수유를 단박에 밀어내고 며느리를 끌어 앉힌 것이다.

시집온 첫해에 며느리는 산수유를 몰랐다. 빨갛게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가 그리 고울 수가 없어 그림을 감상하듯 마당 옆 담벼락 사이로 산수유를 올려다보곤 했다. 한 겨울, 잎 하나 없는 가지에 열매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참 신비로운 것이라 여겼다. 어머니는 산수유를 말린 차를 온갖 약나무와 함께 끓여 물 대접에 내어왔다. 감기에 든 며느리를 위해 꿀까지 얹어 내어온 것이다.

며느리는 산수유와 약나무를 끓인 물 대접을 받아들며 이상하고 시큼한 그 맛에 미간을 찌푸렸다. 물 대접에 어머니의 모든 정성이 녹아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서울에서 시골까지 내려오며 걸린 시간만큼 물 대접에 공을 들였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어머니가 마당으로 나가 산수유를 딸 때는 며느리도 따라나서 거드는 시늉을 했다.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를 쳐다보며 산수유를 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고개도 아프고 어깨도 저려 왔다. 어머니는 장갑을 벗어 던지며 능숙하게 산수유를 따 모았다. 장갑을 벗은 어머니의 손은 삽시간에 발갛게 물들었다. 가시에 찔린 핏물인지 산수유 물인지 모를 붉은 색들이 어머니의 언 손 위에 흘러내렸다. 며느리의 손도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검게 변한 손을 보고 며느리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어머니는 슬며시 비누와 수건을 내어 주었다.

며느리는 다시 산수유 씨를 발라내는 일을 돕겠다며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씨와 껍질을 가르는 일도 나무에서 산수유를 따 모으는 일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산수유의 껍질을 벗겨내는 일은 마음속 먼지를 털어내는 것과도 흡사했다. 씨에 붙은 단단한 먼지들을 털어내고 깨끗한 마음들을 모아 새롭게 굳히는 작업 같았다. 내가 마신 물 대접에 반도 못 채운 며느리는 삭신이 쑤셔왔다. 며느리에게는 더 할 수 없는 힘든 노동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겨우내 산수유를 따고 말리는 노동을 견뎌 내었다. 삶의 무게를 받아내듯 묵묵히 겨울을 산수유와 함께 보낸 것이다. 어머니는 손톱만큼 단단해진 산수유 육질을 시골 장에 내다 팔았다. 서울 가는 며느리 가방 속에도 잘 말린 육질을 쟁여 넣고 그 속에 꼬깃꼬깃 접은 돈을 차비라도 하라며 묻어 두었다. 겨우내 산수유를 팔아 번 돈이었다.

딸로 산 세월보다 며느리로 산 세월이 더 많은 지금, 며느리가 시댁을 찾는다. 회색빛 돌담 이끼마저 마른 골목을 돌아 어머니가 없는 빈집에 들어선다. 마당 옆 오래된 산수유나무만이 열매를 매단 채 우두커니 빈집을 지키고 있다.

며느리는 뒤뜰에서 사다리를 가져와 나무 위에 걸쳐 놓는다. 혼자 집을 지키며 열매를 맺은 산수유를 바가지에 따 담는다.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 붉은빛 열매가 박바가지에 그득하다.

며느리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산수유차를 만들 생각이다. 꽃처럼 피어나 씨앗처럼 단단한 삶을 살아 온 어머니를 위해 온갖 약나무와 산수유를 넣어 어머니가 그랬듯 오랜 시간 달여 보리라. 어머니의 그릇, 물 대접에 담아 따뜻한 차 한 잔 데워 드리리라.

잠깐 사이 며느리의 손에 붉은 물이 흐른다. 가시에 찔린 핏물인지 붉은 산수유물인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빈집에 훈기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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