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 이까짓 거 / 권상연

 

 

새 달력을 걸었다. 해가 바뀌어 간다는 신호다. 이제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테지. 하지만 상관없다, 이까짓 거.

박현주의 그림 동화 <이까짓 거>로 아이들과 하브루타를 진행한다. 하브루타는 짝을 지어 토론하는 교육 기법의 하나로 유태인들의 탈무드 교육에 많이 쓰였다고 한다. 각자가 만든 질문을 가지고 짝 토론을 진행한다. 질문을 듣고 질문을 되돌리면서 스스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토론을 이끌어가는 하브루다.

글자보다 더 많은 그림 속에서 숨은 문장을 찾아 나선다. 선 하나부터 점, 색깔의 변화를 살피며 아이의 마음을 읽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타나는 아이의 옷차림 변화까지도 세세히 살핀다. 빈 여백에서 꼭꼭 숨겨진 문장을 찾을 때의 기쁨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다.

한 아이가 서 있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집에 갈 궁리를 한다. 우산이 없다. 그 때 빗속을 뛰어가는 한 아이가 눈에 띈다. 작년에 같은 반을 했지만 한 번도 말을 걸어 본적이 없는 아이다. 그 아이가 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아이에게 불현듯 용기가 생긴 걸까. 다른 아이도 힘차게 뛴다. 단순한 그림책이지만 나는 그 속에서 내 어릴 적 비 소리를 듣는 호사를 누린다.

어린 날의 비는 시원했다. 큰 비닐을 보자기처럼 덮어쓰고 개구쟁이 스모프처럼 거리를 쏘다녔다. 머리부터 정강이까지, 온 몸을 투명 비닐로 감싼 채 종종걸음 치며 깔깔 거리는 스모프들, 빗속은 무서울 게 없는 나의 세상이었다. 아무리 억센 비일지라도 동무인 스모프를 만나는 순간, 그 비는 이미 동화속의 한 캐릭터가 되어 다정한 음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래, 이까짓 거’

비닐에 떨어지는 비 소리를 들으며 학교에 갔다. 교실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비닐은 담아온 빗물을 교실바닥에 풀어 놓았다. 뚝뚝 떨어지는 물이 마룻바닥을 흥건히 적셨건만 마대걸레를 든 아이들 얼굴에는 장난기가 그득했다. 마루에 스며들기 전에 빨리 닦아내라는, 동동거리며 채근하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빗속의 아이를 따라가는 것 같다.

몇 년 후, 우산이 생겼다. 아주 얇은 비닐을 모자로 쓴 대나무 우산이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세게 불면 휘딱 뒤집어 져 우산을 바로 펴느라 옷이 더 많이 젖는 것도 몰랐다. 부러진 우산을 수리하던 아버지와 빗속을 뛰어가는 어린 나, 파란 비닐우산을 그림책 여백에서 만난다.

한 번도 뛰어 볼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아이가 빗속을 뛰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좀 더 자라서는 우산을 내팽개치는 일이 잦았다. 빗속을 걸으면서, 뛰면서 나는 한 번도 비가 멈추기를 바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가슴까지 뻥 뚫어 시원하게 했던 비를 맞으며 세상의 두려울 것 없는 천하무적 같았던 풋풋한 기억. 지금의 나는 어떨까. ‘이 까짓 꺼’ 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이 있던가.

나에게 있어 학교의 벽은 늘 높았다. 그림책 읽기 연수를 마친 후에도 학교에 출강한 적이 없을 정도다. 실력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학교는 교원 자격증을 갖춘 사람만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습관처럼 자리한 자격지심이 나를 가로 막고 있는 탓이었다.

공부만 잘하면 다 되는 줄 알았던 학창시절, 사회의 벽은 높았다. 필요로 하는 자격증을 다 갖추고 지원을 했지만 면접을 본 회사마다 외모를 들먹였다. 목이 짧다,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입맛을 다시듯 한 마디씩 던지는 말들이 애벌레로 둔갑해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어갔다. 부족한 것들만 의식하다가 내가 가진 좋은 점마저 잃어버리는 못난이가 되었다.

몇 년 전, 끼와 춤, 노래 실력을 겨루는 경연이 있었다. 많은 청소년들이 예선을 통과하고 결선 진출을 했다. 그 때 한 심사 위원이 여자 출연자에게 ‘살 빼라’는 주문을 했다. 얼마 후 그 출연자는 다이어트를 해서 날씬한 몸으로 다음 경연장에 나타났다. 의지로 본인의 가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이던가.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질투도 났다. 지천명을 넘어 하늘의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나이임에서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그녀가 부러웠다. 나에게도 나를 이끌어줄 이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다.

지천명, 이까짓 꺼하며 다 넘어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 그런데 그 지천명의 나이가 이제는 걸림돌이 되어 나를 막는다. 함께 하는 이들이 나보다 한참 아래인 40대인데가 그림책을 읽어 주는 대상이 어린이들이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나이를 의식하게 되고 자꾸만 움츠려 든다. ‘안 그래야지, 지금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는 아이들의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본다.

빗속을 먼저 뛰어간 아이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마도 그 아이는 늘 그렇게 뛰었나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뒤따라오는 아이에게 안녕을 고하며 학원으로 들어간다. 남겨진 아이가 또다시 우산을 쓴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를 바라보고 섰다. 거리에는 부모님 손을 잡고 오가는 아이들도 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섰던 아이가 빗속으로 뛰어간다. 그 때였다. 새로운 아이 하나가 방금 뛰어간 아이의 뒤를 따라 뛰어간다. 아이의 뒤에 숨어 비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다.

20대의 나는 작은 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정신없이 내 길만 가고 있을 때는 외모에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직장을 구하면서 외모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작은 키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처음 나간 소개팅에서 키가 작다는 이유로 퇴자를 맞고 난 후, 멈추어진 키처럼 나의 자존감이 바닥에서 멈춰 버렸다.

서른 즈음에 동아리 활동에서 한 선배를 만났다. 큰 키 덕분에 대기업에도 척척 붙고 남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선배는 나에게 바꿀 수 없는 외모에 집착하느라 내가 가진 좋은 점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라고 했다. 그때의 그 말이 큰 덩치 때문에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거절당한 선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는 걸 안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지금도 나는 나이라는 폭우 속에 서 있다. 하브루타를 이끌어갈 동료들을 돞아본다. 내 앞에 선 이보다 뒤에 올 이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지천명은 삶을 주도적으로 풀어 가도 괜찮을 나이, 길을 잃고 멈춰선 이에게 나를 따라 뛰어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도 좋을 나이지 않은가. 내 뒤를 따라 올 이들을 위해 용기를 낸다.

‘그래, 이까짓 거’

<에세이문학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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