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언어가 목마르다 / 신재기

 

 

딸이 우리 동네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 첫 방문이었다. 아파트 벽면에 크게 적힌 '예미지'라는 이름이 정겹게 느껴졌다. 무슨 뜻인지 궁금증을 안고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데, 'PARKING'이란 영어가 좌우에 'IN'/OUT'과 함께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 옆에는 ' INFORMATION'이란 표기가 지나가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우리 일상에서 이러한 영어 사용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20년 가까이 사는 우리 아파트 이름도 '리버파크'가 아닌가. 내가 만든 잡지를 구독자에게 우편으로 보낼 때마다 한국 수필가는 전부 외국어 이름이 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도시에 빽빽이 들어선 건물의 전면에는 영어 간판이 반을 넘는 듯하다. 아예 날것으로 표기된 것도 수두룩하다. 일상생활이나 대중매체가 사용하는 영어는 얼마나 많은가. 어느 텔레비전 방송에서 <훈민정음 탁구대회>란 예능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경기 도중 영어를 사용하는 팀은 그때까지 얻은 득점을 몽땅 잃어버리는 규칙을 적용하는데, 시합은 연신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영어가 우리 언어 사용에 넓게 침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분노가 어느새 허탈함, 초라함, 부끄러움 등으로 전이된다, 어찌하랴, 이 거대한 흐름을.

40여 년간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한글'의 우수성이나 '국어순화'를 입에 올렸다. 마치 애국과 민족애의 사도처럼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물론 순수한 사명감 같은 것도 있었다. 나는 한국현대문학을 전공했다. 그것도 1920-30년대 일제강점기 문학이었다. 어느 순간 내 공부의 한계가 분명해졌다. 일본어를 외면한 결과였다. 시험에 통과하려고 시간을 투자했던 영어, 독일어, 중국어 공부는 내 학문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한국문학을 제대로 연구하려면 일본어로 된 기록과 연구물을 능숙하게 독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늦었다. 왜 일본어를 외면했던가. 1970년대 대학에 들어갔을 당시 국문학도는 일본어를 공부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겼다. 민족에 대한 배신이라는 무의식이 작동했던 것 같다. 얼마나 허무맹랑한 태도이고 허술한 이데올로긴가. 얼마나 밋밋한 '국뽕'인가. '신자유주의' 혹은 '글로벌'이란 개념이 확산하면서 '국어순화'는 한글날 무렵에 의례적으로 뱉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국어순화'를 입에 담는 순간 '꼰대', '라때', '촌스럽다', '시대착오'등 온갖 공격이 쏟아지리라.

우리 동네의 행정상 명칭은 '서변동'인데, 이 지역 원래 이름은 '무태無怠 '다. 딸이 이사 온 동네는 무태와 붙어 있는 '연경硏經'이다. 연경에서 북동쪽으로 인접한 동네는 신승겸 장군의 유적지가 있는 '지묘智妙'다. 팔공산 자락 이 일대는 왕건의 고려군과 견훤의 후백제군이 전투를 벌였던 곳이고, 지명 대부분이 이와 연관되어 붙여진 것이다. '무태'는 왕건이 이곳을 지나는 길이 주민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연경'은 선비들의 경 읽는 소리를 듣고 붙인 지명이라 한다. 팔공산에서 남서쪽으로 이곳을 흐르는 내가 동화천桐華川인데, 옛 이름은 '살내'이다. 고려군과 후백제군의 전투에서 화살이 내를 가득 메워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이 지역은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이 도시개발로 아파트가 숲을 이루는 신도시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아파트의 이름과 많은 일상어가 영어 표기로 바뀌었다. 아이파크, 아이위시, 로제비앙더퍼스트, 아이유쉘포레스트, 뉴웰시티디어포레, 딸아이가 입주한 아파트 이름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은 '예미지 숲속의 아침'이다. 그런데 몇몇 젊은 입주자가 영어 이름을 붙이지 않았음을 항의했다고 한다. 특정 장소는 시간의 흐름으로 생성된 의미와 가치의 공간이다. 그런데 그 장소의 의미를 깡그리 묻어버리고 이처럼 외국어로 도배한 까닭은 무엇인가. 개발의 실용적 논리와 자본의 힘을 뛰어넘기 어려운 시대이다. 하지만 때로는 밋밋한 '국뽕'이 주체성과 품격을 지키는 푯대가 될 수도 있으리라.

'주차장' 대신 영어 'PARKING'으로, '관리실(경비실)'이 아닌 'INFORM-ATION'으로 표시하는 속내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주차장'이나 '관리실'도 한자에서 온 말이기에 순수한 우리말이 아닌 점은 'PARKING'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인가. 글로벌 시대, 영어는 세계 공용어나 마찬가지다. 국가 간 경쟁에서 이기려면 영어의 능통한 구사는 필수적이다. 한때 '영어 공용화'가 우리 사회의 쟁점이 되기도 했다. 영어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 절감, 경쟁력 있는 인재 양성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사실 언어중력 이론에 의하면 영어는 '초중심 언어'로서 다른 하위층위의 언어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즉 모든 언어는 자신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언어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언어 사용도 문화적 경향이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정책에 의해 통제되기보다는 자연적 흐름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어가 대세인 이 시대에 아파트에 외국어 이름을 붙이고, 주차장을 'PARKING'으로 표시하는 것이 뭐가 그리 문제냐며 항의하면 할 말이 없다. 역사적 전통, 주체성, 고유한 정체성보다는 밥과 돈이 우선되는 세상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언어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생산하고 사고 방법을 형성하는 것이 언어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조지 오웰의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실용성을 추종하는 기술과 자본, 상투적이고 얄팍한 유행과 허영, 정파적 이념, 기계적 알고리즘의 조박粗薄함에 저항하는 언어가 절실하다. 삶의 구체성과 토착성이 묻어나는 언어, 대지가 붙안는 햇빛과 비와 바람의 언어, 돈에 속박되지 않은 순박한 사람의 언어가 목마르다. 이것이 바로 '시적 언어'이고 '문학의 언어'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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