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지도 / 임덕기

 

지인이 집을 팔고 전세로 간다고 한다. 의아한 생각이 든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그들은 오랜 세월 한집에서 편안히 잘 살았는데, 뒤늦게 집을 팔고 전세로 가고 싶어 해서 내 일처럼 염려스럽다.

사람들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망도 질량불변의 법칙인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언젠가 꼭 해보고 싶듯이, 전세를 살아보지 않아 버킷리스트처럼 해보고 싶은가보다. 뒤늦게 불안정한 생활을 하려고 해서 이해가 안 된다.

누구든지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 전세살이를 해본 사람은 안다. 내 집이 아니라 정이 가지 않고, 언제 이사 갈지 몰라 마음이 늘 편안치 않다. 전세도 살아보고 다양한 생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지혜의 폭이 넓고 깊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경험자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제발에 걸려 넘어지기 쉽다.

지인은 사십 년 동안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오죽 답답하면 집 팔고 전세로 살면서 이사 다니고 싶어 할까하는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지인의 인생지도는 아마 선 대신 점으로 남아 있을 듯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과 삶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산다. 언제 어디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교에 다니고, 그리고 늙어 가는지를 그림으로 그리면 인생지도가 되리라. 좋은 이웃을 만난 기억들은 부수적으로 함께 따라다닌다. 주거지 따라 방향을 가리키는 선線에 실팍한 기억들이 함께 얹혀 가리라.

인생지도에는 여기저기 선들이 길게 뻗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겹치기도 할 것이다. 어릴 적 고향을 떠난 이들도 있고, 결혼으로 삶의 터전이 바뀐 사람들,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온 이들, 직장 때문에 살던 곳에서 다른 곳에 뿌리 내린 이들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옮겨 다닌다.

많은 이들이 결혼 초에는 자리를 잡지 못해 이리저리 노마드처럼 전세로 떠돈다. 자식들이 학교에 들어갈 나이쯤 되면 한군데 정착해서 살려고 한다. 전학을 자주 다니면 아이들 인성발달과 친구관계가 좋지 않아서다. 초등학교부터 좋은 학군 따라 철새처럼 이사 다니는 부모도 있다. 열성적인 부모는 자기 집 대신 학군 좋은 곳으로 이사 가서 비싼 월세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는 지역 따라 선이 오고가다, 어느 한순간 생을 접으면 방향을 가리키는 직선도 멈춰버린다. 인생지도는 그것으로 끝난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지도에 긴 직선과 짧은 직선들이 보인다. 부모님이 사시던 포항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 무렵에 공부 잘하던 큰오빠를 위해 가족이 서울로 이사 왔다. 아버지 사업으로 강원도에 가서 잠시 살기도 했다. 자식들은 서울로 되돌아와서 학교를 다녔고 그 후에는 계속 서울에서 살았다.

결혼 후 이곳저곳에 이사 다녔다. 서울에서는 강남구에서 아이들 학교 보내느라 가장 오래 살았다. 나중에는 살던 동네 근처에서 이사 다녔다. 지금은 서울근교에서 전원생활하며 살고 있다.

이제 나이가 드니 이사 다니는 게 만만치 않다. 이사를 하면 한 번씩 장마에 쓸려가듯 묵은 살림을 버릴 수 있어 좋긴 하다. 비록 세월의 먼지처럼 집안에 잡동사니가 늘고 마음이 단조로워도, 한군데에서 오래 사는 게 마음은 더 편안하지 않을까.

이사하면 새 동네에서 새 벽지와 새 가구로 마음이 산뜻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묵은지가 좋고, 오래된 와인이 좋고, 오래된 친구가 좋듯 한 지역에 오래 뿌리 내리고 사는 게 사실은 더 좋다. 경험에서 나온 생각이다. 자식들에게 마음의 고향도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은가.

예전에 시골동네에는 늙은 느티나무가 한그루씩 있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나무다. 당산나무로 오랫동안 마을 주민들과 함께 산다. 늘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서 있어 단조로워 보이지만 주민들은 애틋한 정이 쌓인다. 자주 이사를 다니면 인생지도에 복잡한 선이 남는다. 다양한 사건과 잊지 못할 일들이 인생의 훈장처럼 쌓여간다. 하지만 당산나무처럼 묵은 정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만날 기회는 적으리라.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약간의 경사가 있어 ‘저 동네 사는 사람들은 힘들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내가 그 동네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무의식 속에 각인이 되어서일까.

어쩜 인생지도는 누군가의 큰 그림 속에 이미 그려져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운명도 그렇지 않을까.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