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목 / 정선모

 

 

가끔씩 지나다니는 길목에 철도 건널목이 있다. 중앙선 열차가 오고가는 선로인데 도로와 교차되어 있어 그곳을 지날 때면 조금씩 지체되곤 한다. 가뜩이나 통행량이 많은 곳인데 기차가 지나가기라도 할 때면 길게 늘어선 차들이 꼼짝없이 발목을 잡힌다.

어쩌다 푸른 신호를 받고 서둘러 달리다 건널목에 다다르기도 전에 노란 불로 바뀔 때가 있다. 앞에 차가 없으면 달리던 힘을 믿고 냅다 가속페달을 밟아대어 가까스로 건널목을 건너 교차로를 지나가기도 하지만 앞에 가던 차가 머뭇거리면 어정쩡하게 멈추게 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지난번에 그곳을 지날 때였다. 출근시간이 지났을 땐데도 길이 많이 막혔다. 신호가 바뀌어도 겨우 몇 대만이 빠져나갈 정도로 정체되어 사방에서 밀려오는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조금씩 교차로의 신호만 보고 가다가 그만 앞차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내 차가 건널목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였고, 그 바람에 뒷바퀴가 철로에 걸쳐버렸다. 근처에 있던 역무원이 달려와 앞의 차를 옆으로 조금 빼게 한 후에야 비로소 안전거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 경적소리를 내며 기차가 휙 바람처럼 지나갔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실은 역무원이 진작부터 깃발을 들고 철로 옆에 서 있었는데도 난 공중에 걸려 있는 교통신호만 보고 서둘러 빠져나갈 생각을 했었다. 얼른 건너면 뒤따라오는 차가 선로에 진입하지 않고 멈추겠지 하는 생각에 위험에 처할 뻔한 것이다. 역무원에게 호된 질책을 들은 건 당연했다. 뉴스 시간에 종종 건널목 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부주의한 행동을 나무라곤 했는데 바로 내가 그런 입장에 놓이게 될 줄이야.

건널목엔 반드시 ‘우선멈춤’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그런데 난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느라 표지판의 주의사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위험요소가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커다란 글씨로 써놓았는데도 ‘설마’하다가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 우리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앞만 보고 달리라고 채찍질하셨다. 잠시라도 곁눈질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수학공식보다 인생의 의미를 파헤친 소설에 흥미를 느껴 책을 읽느라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였던 내게 선생님의 일방적인 강요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공부 외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채 목표를 향해 직진만을 요구하는 다그침에 학창생활이 고역이었다. 그것이 제자를 위한다는 명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던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의 숨통을 틔워주는 한 선생님이 계셨다. 배울수록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렵기만 했던 화학 과목을 담당했던 선생님이었다. 점심시간 직후에 화학 수업을 들으려면 청동으로 만든 추를 매단 듯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칠판을 두드리고 분필을 날리며 아무리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재미나게 수업을 이끌려 애를 써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우리를 위해 선생님은 가끔씩“수업은 잠시 중단!”을 선언하고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당시 유행하던 팝송이나 유행가를 때로는 클래식하게 때로는 신나는 댄스 가요풍으로 기타 줄을 튕기며 분위기를 돋우면 꿈나라를 오락가락하던 우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책상을 치며 환호했다. 서너 곡 그렇게 노래를 불러준 뒤 말똥말똥해진 우리를 향해 “마지막 한 곡 더!”를 외치며 부른 노래는 화학기호를 가사처럼 이어 불인 것이었다.

“작고 가벼운 수소 H, 하늘을 날게 하는 헬륨 He…….”

이런 식으로 화학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까지 재미있게 따라 부르게 하여 저절로 어려운 화학기호를 외우게 하였다. 그리고는 수업이 끝나기 직전에 항상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금과옥조 같은 한 마디를 하시고 교실을 나가셨다. 매번 다른 말씀을 해주시는데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것이 바로 ‘건널목’에 관한 것이었다.

“살아가다 보면 많은 건널목을 만날 것이다. 대학을 갈 것인가, 취업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지금 이 순간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건널목일 수 있다. 잊지 말거라. 건널목은 빨리 건너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안전하게 건너는 게 제일이라는 것을. 서두르다 사고 당한 뒤 후회하지 말고, 전후좌우를 잘 살피고 건너는 습관을 들여라.”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교내 어디서 만나도 책을 읽고 있던 선생님의 모습이 사고를 당할 뻔한 차 안에서 불현듯 떠올랐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인가. 순간적인 실수의 현장에 갑자기 기억 저편에서 걸어나와

“거봐, 꼬맹이야. 위험했잖아. 건널목에서는 절대 서두르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쯧쯧…….” 하며 꿀밤 한 대 딱! 하고 쥐어박으시고는 또 다른 제자를 향해 사라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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