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 / 김정섭

 

그녀는 서울 안산 자락 옥천동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래서인지 말수가 적고 삶에 대한 의지가 남보다는 조금 강했다.

“나는 엄마 얼굴을 본 적이 없어.”

늘 그 문장에는 야트막한 한숨이 배어 있었다.

그녀 가족은 공책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했다. 공책을 제본하고 삽화도 그려 넣어 공장에 납품했다. 그녀는 토끼, 강아지 같은 동물들을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가족은 만주 간도로 이사했다. 일곱 살 철없던 시절 그녀는 그곳 이층집에서 살던 때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해방이 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열다섯 살 때였다. 남으로 피난 갈 때 아버지가 자기만 굴비 반찬을 챙겨주었다고 은근 자랑을 하곤 했다. 홀아버지에겐 난리 통에도 엄마 없이 자란 막내딸이 짠했나 보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서울에서 운명처럼 한 남자를 만났다. 평양에서 일사후퇴 때 피난 나온 동갑내기였다. 키가 작은 그녀는 키 큰 남자가 좋았다. 고아나 다를 바 없는 야간 고등학교 졸업반 남자를. 둘은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했고 청계천 변 초라한 판자촌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가끔씩 시동생이 찾아와 셋이서 한 이불을 덮고 자기도 했다. 그런 다음 날 시동생은 모아둔 장사 밑천을 훔쳐 사라지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시동생을 나무라지 않고 다시 돈을 모았다. 문산 미군 부대에서 삼엄한 단속을 피해 물건을 빼내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양키 장사를 시작했다.

2년 후 딸을 낳았지만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바로 다음 해 아들이 태어났다. 추운 겨울 자신 몸집만 한 부피의 목화솜 포대기를 처네에 겹겹이 둘러업고 장사를 했다. 그녀는 장사 수완이 좋았다. 영어를 배운 적이 없었지만, 간단한 영어를 읽을 줄 알았고 상품 이름을 줄줄이 외웠다. 그녀의 큰 눈은 선해 보였고, 나긋한 서울 말씨엔 믿음이 전해졌다. 단골이 점점 늘어났다. 모 대기업 사모님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와 허물없이 지내던 사모님은 회장 남편이 돈은 잘 버는데, 얼마 전 밖에서 애를 낳아 왔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마치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막내딸이 태어나면서부터 형편은 좋아져 종로구 연지동에 한옥 집 한 채를 장만했다. 장사는 순풍에 돛 달 듯 순항, 큰 통조림 도매상으로 규모를 확장했다.

삼십 대 중반 견디기 힘들었던 어느 날 그녀는 약을 먹었다. 바람피우는 남편이 미워서, 눈 딱 감고 견뎌온 세월이 허무해서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던져버렸다. 그리고 삼 일 후 깨어났을 때 옆에서 울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그녀의 초점 없는 눈에선 회한의 눈물이 쏟아졌다.

훌훌 털어버리듯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사학년 아들에게 하나밖에 없는 언니네로 가자고 했다. 갈 곳이라곤 거기밖에 없었다. 휴가인지 가출인지를 모를. 그런데 돈이 없다며 아들에게 차비를 내라 했다. 그녀에겐 남몰래 모아놓은 돈이 제법 많이 있었다.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이었을까. 아들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돼지 저금통 배를 갈라 엄마에게 모두 주었다. 아들은 어느새 훌쩍 철이 들어 있었다. 그때 아들은 ‘애어른’이었고, 그녀는 ‘어른아이’였다.

오랜만에 언니를 만난 그날,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오랫동안 절제된 굳센 버릇이다. 하룻밤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아침에 가게를 나갔다. 그녀의 전부인 가정을 포기하고 벼랑 끝에 서게 했던 그 사건은 흐르는 세월 따라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오십 대 초반 그녀는 삼십 년 동안 했던 장사를 그만두고 암에 걸린 남편의 병수발을 위해 살림을 시작했다. 남편의 병세가 심해져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느 날 아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녀는 여느 때 같으면 삼십 분도 안 돼 돌아왔지만, 그날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남편이 어디 갔다 왔냐고 짜증을 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세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용하다는 박수무당을 찾아 거금을 들여 굿판을 벌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다. 마치 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것처럼. 하지만 백 일 후 허무하게 남편은 떠났다. 환갑에 홀로되고 십여 년이 지나서, 아들이 그때 왜 늦게 돌아왔냐고 물었을 때 표정 없는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냥 다 내 팔자다.”

평생 불교 신자로 살던 그녀는 나이 팔순에 세례를 받고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칠 개월의 교리 공부 때는 사대 복음을 필사해 세례식 날 신부님께 상도 받았다. 아들 내외와 함께 주일 미사를 보고, 노인 대학을 다니며 그곳 친구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떠난 후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던 2년간의 시간이었다.

어느 날 뜯어진 일기장처럼 그녀의 하루는 한 페이지, 한 구절 모든 것이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던 그녀는 스마트폰을 끝내 배우지 못했고, 아들 말도 듣지 않았다. 하루하루 점점 자신 속으로만 빠져들어 갔다.

그 무렵 치매 등급을 받고 노인 유치원인 데이케어센터에 나갔다. 탁월한 친화력으로 눈치 있게 그곳 생활에 적응했다. 집에 오면 아들이 가져다주는 책을 늦은 밤까지 읽었다. 어느 치매 걸린 남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작은 어깨를 들먹이며 서럽게 울기도 했다. 당시 독서는 그녀 인생의 마지막 구원이었다.

언젠가부터 달력을 보지 못했고 가족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물이 새어 들어오는 배에서 천천히 침잠하며 기억들은 하나하나 해체되었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멈춘 시계처럼, 예정에 없던 일들이 그녀 앞에 닥쳐왔다. 삼십 년을 같이 산 아들 부부를 질투했다. 고독했던 인생에 켜켜이 쌓인 분노는 가족들에게 낯선 폭력으로 표출되었다. 그녀가 난폭해질수록 아들은 점점 힘들어졌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그해 눈부신 햇살 가득한 봄날. 평생 아끼던 것들은 물론 자존심까지 다 내려두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딸의 손을 꼭 잡고 집을 나섰다.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들을 뒤돌아보며 눈 설고 낯선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세상의 흐름에 모든 걸 내맡겼다. 그 옛날 열다섯 살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피난 가던 수줍은 소녀처럼. 빈손으로 떠나는 이번 여행이 그녀의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 남겨진 아들은 생각했다.

그녀는 늘 자신을 은이라 불렀다. 아마도 어머니는 이 소풍이 그리 길지 않길 바랄 것 같다.

<에세이 문학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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