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비의 선택 / 조미순

 

등산로 초입에 선다. 양손에 스틱을 잡으니 의지가 된다. 내 안의 갈망도 등을 민다. 의사는 관절염 환자에게 등산이 ‘독’이라 말렸지만,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고파 고집스레 나선 길이다.

망해사로 빠지는 곁길은 조붓하다. 경삿길로 내려서는데 주먹만 한 두꺼비가 오도카니 앉았다. 녹색 바탕에 불규칙한 무늬가 있는 어린 독사에게 엉덩이를 물린 채다. 두꺼비는 당황한 듯 큰 눈을 껌뻑이며 내게 묻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빠졌는지 혹시 얘기해줄 수 있냐고.

나도 묻고 싶었다, MRI 영상을 세밀히 본다면서도 오른쪽 무릎뼈에 통증 요인을 찾을 수 없다는 의사에게. 그럼 몇 년 전 미세천공수술 받고 켜켜이 쌓여가는 내 아픔은 어디에서 오는 거냐고.

4년째 ‘명의’라는 분들을 찾아다닌 결과는 비슷했다. 소염진통제와 주사, 물리치료 처방이 다였다. 허탈했다. 원인 치료가 없는 장기 투약은 환자에 대한 방관이 아닌가.

절룩대는 걸음이 몸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오른쪽 골반과 허리에까지 문제가 생겼다. 매일 진통제를 먹어도 서너 장의 파스를 붙여야만 잠을 청하는 나날이다. 몸이 보내는 신호가 나날이 집요하고 강해진다. 내 고통의 뿌리를 찾아줄 이는 없는 것일까.

스틱으로 둘을 떼어놓을까 망설였다. 인간이 자연계의 먹이사슬에 개입하는 것도 옳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뱀이 무서워 다가설 수 없었다. 두꺼비가 마침내 용기를 냈다. 폴짝 뛰었다가 한숨 돌리고 다시 뛰었다. 뱀이란 족쇄 때문에 이동거리는 제한적이었다. 녀석은 예상보다 지혜로웠다. 움직이는 방향이 절개지 쪽이었으니.

며칠 전 병원에서 도수치료를 받았다. 다리에 근육이 많이 빠졌다며 물리치료사가 걱정했다. 실내자전거 타기나 수영, 아쿠아로빅 같은 걸 꼭 하라고 했다. 나는 코로나19가 물러나 수영장이 개장하면 아쿠아로빅을 다시 할 참이라고 했다. 그 말끝에 애써 눌러왔던 갈망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다리 근육을 키워야 한다니 짧은 산행이 도움이 될 거라고 믿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트레킹화를 신고 스틱을 챙겼다. 오후 3시가 넘어서인지 집 앞 등산로엔 인적이 뜸했다.

절개지 가장자리에 이른 두꺼비가 흙 벼랑으로 뛰어내린다. 추락할 위기를 느낀 뱀은 황급히 먹잇감을 풀어줬다. 유혈목이는 헛기운만 써서 아쉬운 듯 혀를 날름대며 숲으로 숨어들었다.

두꺼비의 생사가 궁금했던 나는 절개지 바닥으로 갔다. 사찰 뒷마당이다. 옥잠화 무더기가 꽃대를 올린 자리에 녀석은 없었다. 꽁꽁 숨어버렸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라 참 다행이었다.

두꺼비는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독사를 떨칠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절개지에서 뱀과 함께 떨어진다면 탈출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한다면 나머지 절반의 성공 확률도 버리는 거였다. 녀석은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간절한 몸짓, 포기할 줄 몰랐던 녀석의 뜀뛰기는 감동이었다.

두꺼비를 본 건 다리 수술 후 첫 산행에서다. 내 안에서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원망은 무릎에서 기원했다. 이제는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다. 이 감정을 비워내지 못하면 우울증이 올 것 같아 망해사 승탑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말갛게 씻기곤 하던 곳. 그곳은 오랜 그리움의 거처다.

대웅전 측면에 석축을 높이 쌓아 만든 장방형 평지가 있다. 돌계단 끝에 서면 9세기에 만든 승탑 두 기가 마중 나온 듯 서 있다. 회색 법복 차림의 승려 같다. 사선 방향의 끝점엔 석종형 부도가 있다. 먹빛 장삼을 걸치고 가부좌를 튼 스님 같다. 승탑에서 양팔 간격의 거리쯤에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다. 모서리가 깨진 화강암 판석과 둘레에 앉음돌을 놓아 탁자와 의자처럼 쓰이는 곳. 고목이 그늘까지 보시하니 사찰 방문객에겐 만족스런 쉼터다.

예전에 10분 만에 도착했던 곳을 40분 만에 힘겹게 올랐다. 종아리는 부은 듯 뻐근하고, 무릎은 장거리 산행을 한 듯 욱신거린다. 용을 쓰고 걸었더니 골반에선 찌릿찌릿 전기가 온다. 나는 짜증을 부리는 몸을 달랜다. 손바닥으로 문질러주고 주물러준다. 툭툭툭 골반을 치면서 마사지를 한다. 당분간 힘들겠지만 잘해보자고 내 육신을 설득한다. 마음이 행복해지면 몸도 따라 건강해질 수 있지 않냐며.

고목 밑에 앉았으니 스님의 법문이 들리는 듯하다. 세 분 스님이 바람인 듯 와 위로를 건네신다. ‘희망은 힘이 세다.’는 말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원망도 두려움도 슬픔도 내려놓아야 편해진다는 가르침도 내 안에 고인다.

무릎 통증이 더해져 짧은 산행마저도 할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리에 근력이 조금씩 생기면서 보행에 통증이 덜어질 가능성도 있다.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나는 현재에 집중한다. 날마다 행복을 퍼마시러 승탑지에 갈 것이다. 두꺼비처럼 나도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으니 그걸로 족하다.

<에세이문학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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