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 허창옥

 

  

램브란트가 스물세 살 때 그린 자화상을 보면서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명암으로 갈라놓았다. 왼쪽 반쯤은 빛을 받아서 밝은 편이고, 오른쪽에는 다소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가 인간의 영혼이 지니고 있는 밝음과 어두움을 말하고자 했는지. 육화(肉化)된 생명체로서의 바깥모습과 그 내면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는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왼쪽의 또렷한 생김새와 대조적으로 그늘이 진 오른쪽 얼굴에서 그의 감수성, 꿈,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응시하여서 빛과 그림자로 그 의미를 형상화한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아름답다. 그의 진실과 지혜가 엿보인다. 비약이 될지 모르지만 나는 이 그림을 보고 인간이 지니는 양면성에 대해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어떤 의미로든,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다른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사멸하는 육체에 불멸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 그렇다. 없어지는 것과 없어지지 않는 조화가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사람은 누구나 곧잘 내부에서 각기 다른 자신의 목소리를 듣곤 한다. 자아에 맞서는 또 하나의 자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으로 갈라서서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양심과 그렇지 못한 마음이 서로 밀치기도 한다. 죽어 없어질 육신의 편에 기울어지기는 왜 그리 쉬운 일인지. 또 명랑함과 우울함의 양극현상, 선함과 사악함 같은 대립된 의지가 인간의 내면 세계에 함께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백합꽃의 조신함 속에서 찔레꽃같은 분방함이 내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다 비워낸 듯 보이는 초연함 뒤에 우글거리는 사욕(私慾)이 숨어있기도 하다. 그 모든 경우에 나를 대입해 본다. 어느 틀에나 조금 맞아 들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신(神)만이 지선(至善)이며, 사람은 원죄에 붙들린 한낱 피조물일 뿐이라고 엄청난 항변도 해 본다. 또한 스스로 미물임을 아프게 깨달으며 절대자에게 한없이 낮게 엎드리기도 한다.

나는 적어도 풀어지지는 않았다는 자긍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되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말소리도 별로 크지 않은 편이다. 허술한 매무새로 길을 나서지도 않는다. 그렇게 습관이 들어있다. 물론 나무랄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기품이 있어야 한다는 쪽이므로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나의 모습에도 문득문득 눈길이 간다. 큰 소리로 떠들고 손뼉을 치면서 웃는 꾸밈없는 여인이고 싶을 때가 있다. 화가 나면 욕도 해대는 거침없는 사람이 되어도 그게 무슨 큰 탈이랴. 구겨진 옷을 입고 옥수수를 뜯어먹으며 길을 걸어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다.

나만을 향한 이기적인 삶을 살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둔한 신경이고 싶다. 나누지도 못하면서 공연한 죄책감만 느끼는 것이 도리어 민망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평안, 그 테두리 안의 안락함에 눈물겨워 하면서도 나는 때때로 뛰쳐나가고 싶어한다.

만약 내가 곧이곧대로 내 모습을 그려본다면, 렘브란트의 명암과는 다른 뜻으로 더 뚜렷한 경계를 보이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정직하여서 오히려 추하게 보일 는지도 모르겠다. 나 아니었으면 좋았을 내 모습이 하나 둘이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이률 배반적이고 모순 투성이 인 자아를 그대로 그려낼 용기가 나에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존재이다. 구도자와 같은 인격상승이 있을 리 없고, 마찬가지로 양심이나 착함의 반대편으로만 기울어질 리도 없다. 그렇듯 분명치 않을 각도에서 그려낸 나의 모습은 자칫 위선의 더께를 입게될 위험이 없지 않다. 위선을 떨쳐 냈으면 좋으련만 그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체험한 터이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자화상을 그린다면 아무래도 두루뭉실하게 그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나는 길고 긴 내면 조응(照應)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먼저, 뾰족하고 자못 현란하기까지 한 사고(思考)를 연마하고 다독 그려서 융화시킬 작정이다. 생애에 단 한 점 남을 자화상에 독소가 될 만한 것은 더디더라도 걸러낼 생각이다. 그런 다음에 붓을 들것이다. 온화한 빛깔의 화폭에 조용한 눈빛을 가진, 아주 밝거나 몹시 어둡지도 않은 한 폭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그림을 과연 그릴 수 있을까. 삶의 고비에 부딪칠 때만다 뛰어넘지 못하고 굴절된 의식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 가능할 것일까. 내부에 있는 수많은 적들의 충돌을 화합으로 이끌어내는 일이 이제 와서 될성싶지가 않다. 고통스런 자아 인식과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거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겨우 흐트러짐을 면한 정도의 모습이 아닐는지. 그러므로 붓을 들 시간은 나에게 영영 오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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