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서 채우는 즐거움 / 최장순

 

며칠째 속이 더부룩하다. 과식한 탓인가. 소화 안 된 오후가 거북하다. 적당히 내 속사정을 헤아렸어야 했다. 그전처럼 술술 받아들이는 위가 아니다.

 

수년간 몸담은 집이 언제부터인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발 디딜 공간이 점점 줄어든 것 같더니 아예 숨 쉴 공간조차 없어 보였다. 방은 방대로, 거실은 거실대로, 발코니마저 짐으로 가득 찼다. 나는 이미 주인의 자리를 잃은 듯했다. 그러고도 자꾸 들여놓기만 했다. 과식인 내 속처럼. 서재, 옷장, 부엌 등 집안 곳곳이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웬만한 처방은 먹힐 것 같지도 않았다. 물건 몇 개 정리한다고 만성 소화불량이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처방은 두 가지.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든지 눈 딱 감고 물건을 버리는 일이었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 열 평쯤 보탠다면 좋을 것 같았다. 주변을 살피고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답답한 서재도 원하는 만큼 넓힐 수 있는 아파트를 찾기로 했다. 아내를 은근히 부추기며 공간 확보의 당위성을 토로했다.

“남은 인생, 여유롭게 살아보는 거야.”

 

방학이면 미국에서 오는 손주들과 두 달 가까이 같이 지내려면 좀 더 넓어야 된다는 그럴듯한 명분도 내세우면서. 그러나 귀가 두꺼운 아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두 식구가 살기엔 지금도 넓다는 이유였다. 무슨 일이든 일단 저지르고 보는 내 외곬과 아내의 신중함이 부딪쳤다. 다시 되짚어 생각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출가한 자녀들이 오는 것도, 두 손주가 찾아오는 것도 일시적인 일. 분수에 맞지 않게 집을 넓히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다.

 

남은 방법은 하나, 버리는 것이었다. 서재부터 묵은 책들을 덜어내야만 했다. 언젠가는 읽겠지, 빼곡히 꽂아놓은 책들. 그러나 ‘언젠가’는 막연히 먼지만 입은 채 손길이 닿지 않는 지루함에 빠져있었다. 시간이 갈피갈피 쏟아지는 500여 권의 책과 책장 3개를 들어냈다. 기념패, 문진, 페넌트까지 정리하고 나자 서재는 웅크린 숨을 시원스레 내쉬는 것 같았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고물상은 2만 원을 내놓았지만,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사양했다. 단 몇 권이라도 새로운 주인을 만날 수 있다면 족했다.

 

유행을 넘긴 계절이 그리 많을 줄이야! 철 따라 갖추어 놓은 양복들은 간편복에 밀려나 있었다. 애경사에도 청바지와 재킷 차림을 선호하는 탓에 옷장의 터줏대감들은 찬밥 신세였다. 자주 입지 않는 코트, 셔츠, 남방, 카디건 같은 것들도 오랜만에 들춰냈다. 군에서 전역한 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군인정신은 군복에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즉각 뛰어갈 생각으로 보관해둔 전투복과 정복은 옷장 하나를 채우고 있었다. 아내의 옷까지 다 꺼내 놓자 거실은 순식간 산더미로 변했다. 왜 의식주라 일컬으며 옷을 앞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의 그릇 사랑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책을 버리지 못했듯 아내도 쉬이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나하나에 담긴 남모를 사연과 정을 떠올린다면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안쪽에 모셔두고 쓰지 않은 것은 그만큼 아낀 까닭이다. 주방의 찬장이 모두 문으로 닫혀 있어, 어디에 어떤 그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자주 안 쓰게 되는 것들이 공기만 담고 있었다. 보지 않으면 멀어지는 것이 사람만의 일은 아닌듯했다.

 

만성소화불량의 주범은 고가구와 골동품이었다. 전원생활의 꿈은 정원에 배치할 소품들과 인테리어에 적합한 물건들을 모으게 했다. 화각장, 돈괘, 책괘, 여물통, 옹기 굴뚝, 떡 함지, 돌확, 다듬잇돌, 맷돌, 절구 같은 것들이 거실과 발코니를 꽉 채우고 있었다. 묵은 것에서 드러나는 빛깔과 정감을 생각하면서 비좁아도 참고 지냈다. 몇 만 원에서 몇 십만 원씩 하는 골동품들은 용돈을 아껴가며 모은 것. 막상 팔려고 보니 살 때와 달리 헐값이었다.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있어야 빛이 난다. 골동품은 때와 장소에 따라 미적 가치가 달라지고, 애호가를 만나야 그 진가가 발휘된다. 새 주인을 찾아주기로 했다. 몇몇 지인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문득 인근 산책길에서 만난 분들을 떠올렸다. 아파트 1층 앞 화단을 정원으로 가꾸는 부부였다. 수석 하나를 들고 불쑥 찾아갔다. 정원을 가꾸고 있던 안주인이 반색했다.

“어머, 귀한 것을…, 풍란을 붙이면 멋지겠네요.”

 

부인이 꽃차를 내왔다. 차를 나누며 찾아온 사정을 말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물건들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 아끼던 골동품인데 취향이 비슷한 분들께 드리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부부는 아파트 화단뿐만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꽃 농장을 한다며 잘 받겠다고 했다.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바깥주인은 나처럼 골동품을 좋아하며, 정원과 꽃을 가꾸는 즐거움으로 산다고 했다. 창 안으로 들여다본 거실에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장롱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외양간이나 뒷마당, 대청마루 어디쯤을 그리워했을 것들이었다. 집이 비좁다고 답답했던 것은 내가 아니라 콘크리트 벽에 생뚱맞게 갇힌 그것들이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었을 때 탈이 나는 것처럼 소화할 수 없는 것으로 욕심을 채운 나로 인해 탈이 난 것들이었다. 골동품들은 새 주인에게 미련 없이 떠나갔다. 넓은 정원과 농장의 어딘가에서 에서 마음껏 숨 쉬며 제 멋을 드러낼 것이다.

 

집안을 둘러보니 열 평쯤은 족히 넓어진 듯, 곳곳에 드러난 여백이 여유롭다. 채워서 행복하기도 하지만, 버려서 행복한 경우다. 나도 이제 ‘미니멀리스트’라도 된 듯, 비우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버려서 얻은 열 평, 채워서 줄어드는 즐거움이 아니라 비워서 채운 즐거움이다. 이제 내 속만 조금 비우면 될 것 같다.

<문학 수 2020. 11 12(제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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