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보 / 조이섭

 

 

용돈이 6년 동안 제자리걸음이다. 퇴직한 연금생활자 신세라지만, 치솟는 물가를 따라가지 못한다. 아내에게 용돈 올려 달라는 말을 꺼내려다 매번 삼키고 만다. 엄연한 가장으로서 많지도 않은 용돈 하나 맘대로 못하는 처지다. 딱한 거로 말하자면, 어디 그뿐이랴.

설 전날, 가까이 사는 큰아들이 구이용 소고기 세트를 가져왔다. 바닷가 도시에 사는 둘째는 예정에 없던 생선회를 사 왔다. 아이스박스에 초고추장이랑 상치까지 담겨 있었다. 술이 고팠던 삼부자는 식사 전에 생물이라는 핑계로 회를 먼저 차려 놓고 소주잔을 돌렸다. 아내는 생선회를 입에도 대지 않는 큰며느리와 손주들 주려고 소고기를 구웠다. 생선회 덕분에 준비해 온 고기가 절반이나 남았다.

설을 쇠고 작은아들이 돌아갈 때, 아내가 밑반찬 보따리를 챙겨서 들려주었다. 게다가 먹다 남은 소고기를 꺼내 반을 떼어 보따리에 넣어주며 혼자 인심을 듬뿍 썼다. 며느리는 두고 자시라고 극구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아내는 기어코 들려 보냈다. 다 떼어주고 남은 몇 조각, 나는 맛도 보지 못했으니 남은 갈빗살만큼은 내 몫이려니 하고 내심 서운한 마음을 달랬다.

며칠 후, 큰아들이 쌍둥이 손녀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어제 야간 근무하느라 잠을 못 잤다면서 아이를 봐 달라고 했다. 아들이 한숨 자고 일어나자 아내가 밥상을 차리는데, 남은 갈빗살을 냉장고에서 꺼내 구웠다. 먹성 좋은 아들이 허겁지겁 먹는데, 혼자 먹기도 모자랄 고깃점에 내 젓가락까지 걸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명색이 가장인데 자식 녀석들 입만 입이고 내 입은 입도 아니란 말인가. 밥벌이 잘하는 젊은 녀석들이야 좋은 데 다니며 맛나고 귀한 음식을 먹을 기회가 나보다 훨씬 많다. 시퍼런 풀밭만 무성한 식탁을 내려다보자니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남의 남편 챙기기 전에 네 남편이나 잘 챙기라고 호통을 치고 싶지만, 아들을 두고 시샘하는 것 같아 목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만다.

가장권(patriarchal rights)이란 가족을 대표하는 남자 어른이 갖는 절대적인 권리이다. 멀리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는데, 우리나라는 가장 격인 호주(戶主)에게 여러 가지 강력한 권한을 인정했다. 이후 민법을 개정하면서 호주제도 자체는 존속하되 실질적 내용은 있는 듯 없는 듯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전통사회에서 주부는 안채에서 의식주(衣食住)를 비롯한 모든 집안일을 운영했다. 주부권을 내어주고 안방을 물려주는 풍습을 안방 물림이라 한다. 열쇠 꾸러미를 물려받은 며느리는 안방을 차지하고, 시어머니는 상방에 물러나 머물렀다. 안방 물림을 받으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가계를 계승할 아들이 있어야 하며, 접빈객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조상 제사를 받들 수 있어야 했다.

요즘에는 가장의 권리는 대부분 사라졌다. 발골 당한 갈빗대같이 의무만 앙상하다. 반대로 주부의 의무는 하나둘 허물어진다. 아들딸 구별 없는 것은 고사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가정이 많다. 시부모 오는 것도 마다하는 마당에 접빈객이야 말해 무엇하랴. 제사도 합사하거나 아예 생략하는 집도 늘고 있다. 주부의 의무는 사라졌지만, 집안일을 운영하는 권한과 책임은 오히려 더 강화된다.

가장의 권위가 추락하고 주부의 힘이 세진 것은 시대의 변화 때문이다. 아이엠에프와 금융 위기로 실직하거나 파산하는 가장이 늘면서 부부가 똑같이 아르바이트 수준의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거기다 페미니즘(feminism)의 확산에 따른 여성들의 제반 권리가 신장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남편과 가장의 권위가 떨어졌다.

기를 펴지 못하게 된 남편은 스스로 지위를 내던지고 전업주부를 자처하고 나선다. 아내와 자식으로부터 학대당하거나 투명 인간으로 따돌림 받기도 한다. 스스로 만든 껍질 속에 고립된 끝에 우울증에 빠지고 만다. 더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나도 어깨가 움츠러들기는 마찬가지다. 아침을 먹은 뒤 아내가 청소기를 끌고 나오면 나는 부엌으로 간다. 설거지는 물론 아침 커피와 하루 동안 마실 차를 직접 만든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아내가 시키는 일을 말없이 한다. 마늘을 까서 빻기는 퇴직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권한을 가진 가장이 아니라 머슴에 가깝다. 그나마 남은 가장의 권위를 지키려면 몸이라도 건강해야 한다. 아파서 드러눕기라도 한다면 자존감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의 질도 누추해진다. 아픈 나는 차치하더라도 병수발하느라 아내까지 생고생하게 된다. 그래서 아내와 손가락을 걸어 두었다, 제 몸 하나 갈무리 못 할 지경이 되기 전에 내 발로 요양원에 가겠다고.

이러저러한 망상을 접어두고 운동화를 졸라맨다. 흘러가는 강물을 동무 삼아 신천 변을 걷다가 용돈 올려 받을 생각에 빠져든다. 협상에 성공하려면 아무래도 아내의 환심을 사야겠지. 쌈짓돈을 털어서 아내와 고깃근이나 실하게 끊어 구워 먹어야겠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단축키를 길게 누른다. 호랑이 한 마리가 창에 뜨면서 신호음이 울리자, 절로 걸음이 멈춰지고 허리와 어깨가 오므라든다. 이런 천하의 졸보가 가장권 타령이라니.

 

<문학 수.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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