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미 / 이경은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나를 제일 먼저 맞아주는 게 바로 석간신문이다. 인쇄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신문을 집어 들 때, 나는 심호흡을 한 번 길게 내쉬고 다시 들이마신다. 그건 단순히 종이나 인쇄의 냄새가 아니다. 삶의, 세상의 냄새이다. 비록 그 안에 좋은 일보다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더 많이 실려 있고, 정치나 경제의 갈등의 국면들이 때론 적나라하게 그 속과 등을 보일지라도 나는 신문을 드는 순간 행복해진다. 신문의 활자들을 보면서 나는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도 가끔 보니 내겐 세상과 이어지는 다리이다.

그 두 번 접힌 신문이 내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의 기분이란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를 듣게 된다든지, 누군가가 보고 싶었다며 하얀 안개꽃을 가슴에 담뿍 안겨주는 느닷없는 기쁨이다. 바쁘지 않은 날 아침에 조용히 음악을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소소함은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게다가 신문을 넘길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머릿속을 편안하게 만들어, 편안한 명상 음악이라도 듣는 기분이 된다. 아니면 마룻바닥에 한바탕 신문을 있는 대로 펼쳐 놓고 마냥 들여다보면서,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기사를 보며 혼자서 구시렁거리는 일도 때론 작은 즐거움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모 방송국 기자 양반이 "지독한 아날로그시군요." 한다. 요새 누가 바쁜데 그러고 앉아서 신문을 보냐며 약간은 한심한 표정을 짓는다. 그저 옆으로 한번 터치만 하면 모든 신문이 다 나오고, 공짜로 필요한 것만 골라서 보면 되는 스마트폰 시대에 웬 원시인이냐며 시대를 좀 따라가라며 웃는다. 물론 그때에 나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말하는 번호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다. 스마트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정보가 힘이고 권력이라는 세상에서 나는 뒤로 쳐져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같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저 많은 정보를 다 어쩔 것인가 싶었다. 그렇게 빨리 알아서는 또 무엇하랴, 1분 1초를 다투는 수험생도 증권맨도 아닌데……. 뭔가 즉각적으로 알아내야만 하는 압박감에서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다. "천천히 알아도 돼! 아니 좀 모르면 어때?"라고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리고 외치고 싶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기로 단시간에 날아갈 수도 있지만, 가다가 좀 쉬기도 하면서 차창을 스치는 바깥 풍경을 눈에 담는 것도 오죽 좋으랴. 여행은 인생의 창이라는데, 그 창을 그리 빨리 열어 버리면 우리의 호기심과 그리움은 어디에 남겨져야 하나.

나는 어려서부터 밖에 나가면 해찰을 잘했다. 특히 시장에 가면 왜 그렇게 볼 것도 가득하고 먹을 것도 많은지, 서두르지 않는다고 어머니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원래 하려던 것은 까먹고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시장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러니 공부를 잘 못한다며 야단을 맞기도 했다. 공부를 하면 거기에만 정신을 팔아야 하는데, 내 머릿속은 언제나 생각이 가지를 마구 쳐서 자꾸 다른 데로 가곤 했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딴 얘기를 뜬금없이 해서 주위에서 한소리 들은 일도 허다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건 '의식의 흐름'이라고 자위하며, 마르셀 푸르스트에게 감사했다.

필요한 것만 빨리 모아서 처리하는 게 능력 있어 보이는 세상이지만, 한 번쯤 천천히 세상을 해찰하면서 곁눈질을 실컷 해보는 건 어떨까. 상상 속의 지도에서는 고속도로처럼 곧장 이어진 길보다는 모로코 훼스의 골목길이나 피맛길처럼 골목 뒤를 보이지 않게 걸어 다닐 때 더 아슬아슬한 재미가 있을 텐데……. 길을 잃어버릴까 두렵기도 하고 천천히 다 걸어 다녀야 해서 귀찮기도 하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당장은 불필요해 보이는 것도 나중에 요긴하게 잘 써먹었던 일이 어찌 한두 번이랴.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에 대한 이야기는 꼭 장자가 아니라도 우리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는 것을…….

지난해 뉴욕에 갔을 때 일이다. 영화에서나 보고 책에서나 듣던 그 유명한 브로드웨이 거리를 걸으면서부터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드디어 왔구나. 이제야 보겠구나.'

42번 가를 지나 <라이언 킹>과 <맘마미아>광고판을 볼 때만 해도 그저 호기심으로 흥분되었다. 그 구부러진 길을 돌아서서 타임 스퀘어 광장 한복판에 들어섰다. TV 광고에 잘 나오는 그 유명한 타임스퀘어 광장.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점에서 특이하고 탁월하다고 평가받는 한국의 유명한 사진작가 김아타(ATTA, 我他)가 광장 한복판에 앉아 8시간의 긴 노출로 'on-AIR' 프로젝트 <Times Square>의 멋진 사진을 찍었던 그곳, 그는 "존재는 사라지는 순간에야 진정한 존재의 가치를 안다."며,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여 그 가치를 확인하는 지독한 역설의 미학을 펼치고자 했다. 이 시리지를 그는 '시간을 채집한다'고 말했던 게 기억에 남았었다. 나는 그가 어디쯤에서 작업을 했을까 생각하며, 우리나라의 현대 자동차와 삼성, LG 등의 기업 광고가 나오는 계단 위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은 신세계이다. 물질문명이 빚어낸 극도의 환상의 세계, 그 완벽한 인간 진화의 표상의 거리. 영화와 뮤지컬, 연극들의 휘황찬란한 광고들이 어마어마한 크기와 빛으로 사방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모든 테크니컬한 과학과 예술적 아이디어가 한데 뭉쳐 있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곳이 순간 기이하게조차 느껴졌다.

나는 과학 문명의 극점에 서 있는 듯한 환영에 휩싸였다.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할 정도의 저 화려하게 디자인된 빛의 광고판들의 향연, 인간의 꿈과 욕망이 그 거리들 사이로 마구 돌아다니고 있고, 나도 '날아다니는 양탄자' 위에 올라타고 그곳을 훨훨 날아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멀미가 났다. 머리가 어지럽고 빛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이 자연 위에 세운 이 문명의 창작품들 앞에서 나는 마냥 촌스러웠다.

다음 날 나는 새로 사서 들고 온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하면서, 불 꺼진 브로드웨이의 허름한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나는 아직도 멀미 중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저 많은 정보를 아 어쩔 것인가 싶었다. 그렇게 빨리 알아서는 또 무엇하랴. *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