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독讀하다 / 박양근

 

이곳에서는 철따라 다른 맛이 풍겨난다. 이른 봄에는 파릇한 쑥밭이 깔리는가 하면, 식욕을 잃은 늦봄에는 생강나무 꽃 냄새가 풍겨오기도 한다. 여름이 되면 잘 익은 도화가 혼을 빼놓고 가을바람이 차다 싶으면, 중앙절 국화 향기가 다시 그리워진다. 때맞추어 바뀌는 풍경에 넋 놓고 있노라면, 낙엽이 어깨를 툭 건드렸다가는 떨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늘 같지 않다. 움직이고 흔들린다. 계절의 순환도 마찬가지다. 봄이 소생의 시절이라면 여름은 성숙의 절정기이고 가을이 풍요의 시기라면 겨울은 인고의 고비에 해당한다. 사람에 비하면 생로병사이고, 나라에 비하면 흥망성쇠이고, 우주에 대비하면 카오스와 코스모스다. 사계가 그러할 진데 계절에 얹혀사는 만물이 어찌 변하지 않을 것인가?

요즘 나는 바다가 보인다싶으면 마냥 그 길로 들어선다. 변하듯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는 단 하나를 가까이 두고 싶어서다. 이기대가 정말 그런 곳이다. 이기대의 모든 길이 새 풍경을 만들어낸다. 특히 석양 무렵, 적막을 깨는 새소리가 울리면 황금빛 해송이 내 손을 잡아 숲으로 들어오라 한다. 그 순간의 반가움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책이 마침내 문을 열어줄 때의 기쁨과 같다. 자연이 스승이라는 옛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바다 냄새가 밴 숲을 알현할 때면, “아, 자연은 맛있다!”라는 외침을 토하게 된다.

지난 주말 아침에도 이 길을 걸었다.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베푸는 마사지 같은 단비가 저지른 난장亂場을 보고 싶어서이다.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는 떡갈나무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스럽게 무겁게 느껴지고 때맞추어 먹이를 찾아 잠수하는 바다가마우지의 목에 힘이 돋는 게 보인다. 녹녹한 바닷바람과 햇살이 두 손바닥에서 다정하게 얽히고 보랏빛 갯개미취 무리가 검은 갯바위와 어울리면 그 길은 더욱 은밀하게 속삭여준다.

나는 지난해 겨우 한 권의 책 부피밖에 글을 쓰지 못했다.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한해만이라도 지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돌확에 물이 차는 마음을 쫒기로 한다. 매번 바닷길을 빌리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지 싶지만 사실은 옥죄고 있는 무명無明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모든 것이 머리의 기억으로 남기보다 가슴의 추억으로 남고, 그냥 자연스럽게 녹아 한 편의 글로 옮겨지기를 바란다. 그때쯤이면 내가 걷고 있는 바닷길이 경전의 한 줄과 같아질 수 있을지···.

청록 파도가 절벽에 튀겨내는 물방울을 볼 때면 도교의 경전을 모아 놓은 운급칠첨雲級七籤이 떠오른다. 그 중에 팔난八難이 있는데 첫 어려움은 도를 닦으려는 마음을 놓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 어려움은 진짜 스승이 옆에 있어도 하갱이 스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시인 묵객이 세상을 등진 이유가 나름대로 있다싶어 자연이 길을 내 준 것이 고맙기만 하다.

묵은 회상은 어디에서 되살아날까. 기억회로가 망가진 두뇌가 아니라 감성의 림프가 포도알처럼 맺힌 가슴이기를 바란다. 머리 작동이 일시정지할지라도 가슴은 언제나 울먹거릴 테니까.

산책은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 바람이 모든 사물을 살아나게 한다. 희랍의 철학자 탈레스가 물이 만물의 생명이라 하였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바람이 만물을 생동시킨다. 바람이 겨우 내내 누워있던 마른 갈대를 녹색의 깃발로 다시 세우고 설해목에 새 가지를 돋게 한다. 이런 변화를 상상하면 나는 홀로 변하는 것이 무엇이든 사랑스럽기만 하다.

바다를 따라 뻗어 내린 길 중간쯤에 병풍바위가 펼쳐져있다. 이곳에 다다르면 숨이 차지 않아도 한동안 발길을 멈춘다. 오른편으로는 천년무늬를 새긴 바위가 십장생처럼 펼쳐져 있고 왼편으로는 학이 앉아도 좋은 노송 세 그루가 세한도를 이루고 있다. 필시 자연은 무슨 연유가 있어 이런 풍광을 오래 전에 만들어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서면 일상의 끈이 탁 끊어지면서 희열과 전율이 온몸을 감싸 준다. 이런 찰나의 만남이 얼마나 계속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바위는 더욱 노회하고 노송은 더욱 노숙해지리라는 점이다. 그 숙연함을 생각하면 오규원 시인이 노래한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조그만 여자”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이렇듯 나무와 바위와 사람은 서로 조용히 주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배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씀씀이를 말한다. 그러나 배려가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자연이 한순간에 베푼 자비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바닷길이 베푸는 배려라면 무엇보다 마음의 동공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여기는 것도 사실은 여전히 낯설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오랫동안 눈에 익은 돌조각이 오늘만큼 어깨를 숙이고 손을 이마에 댄 사람으로 보이면 이게 자연의 배려인가 싶다. 그래서 나는 매번 세상을 배알하는 기회가 자주 주어지기를 염원하곤 한다.

일 년 중 달이 가장 크다는 슈퍼 보름날이 있었다. 나는 해월을 맞이하러 축시丑時에 이기대로 나갔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린 탓으로, 인적 없는 바다에는 오직 황금빛 달만이 조용히 떠 있었다. 그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냥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시선뿐이었다.

“울지 마라. 세상 어디선가 너처럼 외로움을 안고 가는 사람이 있느니라.”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 위를 환하게 뿌리는 광휘도 요람처럼 일렁이며 가슴을 다독여주었다. 자연을 따른다는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그냥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다는 게 그 순간처럼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내게는 이기대를 사랑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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