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굽자석 / 조이섭

 

 

 

어린 낚시꾼과 물고기가 밀고 당기느라 한창이다. 나무로 만든 손잡이에 매달린 말굽자석과 동그란 자석을 입에 물고 있는 종이 물고기가 ‘잡네’, ‘안 잡히네’ 실랑이한다. 쌍둥이 손녀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눈 깜박임도 하지 않는다.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우리 어릴 적에는 장난감이 귀했다. 자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가난한 아이들은 자석을 직접 만들었다. 멀리 떨어진 기찻길까지 가서 레일 위에 대못을 얹어 붙들어 매어 놓고 역무원의 눈을 피해 철길 옆 비탈에 바짝 엎드렸다. 기차가 그 위를 지나가면 못에 자성磁性이 생겨 자석으로 변했다. 어렵사리 만든 자석은 장난감이라기보다 하나의 도구였다. 동무들은 줄에다 자석 여러 개를 묶어 학교 운동장이나 골목 바닥을 쓸고 다녔다. 엿이나 강냉이로 바꿔줄 쇠붙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쌍둥이 손녀의 놀이방에는 웬만한 어린이집에서 갖추어 놓은 장난감보다 종류가 많고 고급지다. 아들이 제 아이 놀이방에 장난감을 넘치도록 채워 두는 것을 뭐라 나무랄 수는 없다. 아들이 어렸을 적에도 블록을 갖고 놀았다. 그러나 성장하는 데 맞추어 블록을 업그레이드해 줄 만큼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다. 한 가지 종류를 가지고 어찌나 많이 만지고 주물렀든지 볼록한 모서리와 오목한 구멍이 닳아서 헐렁헐렁할 지경이었다. 아들은 제 어릴 적 느꼈던 장난감에 대한 갈증을 기억하고, 딸들은 목마르지 않게 키우겠다고 다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많은 장난감 중에 쌍둥이가 낚시 놀이하는 말굽자석에 눈이 머물러 떠날 줄 모른다. 우리 부부가 살아온 자취가 자석의 특성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 부부는 처음부터 구부러질 줄 모르는 단단한 막대자석이었다. 나는 N극이고 아내는 S극이었다. 자석의 북극, 남극만큼 성격이 달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씀씀이였다. 아내는 살림을 물 한 방울 샐 틈 없이 치밀하고 야무지게 산다. 결혼한 지 40년이 지났는데 여태 한 달도 거르지 않고 가계부를 적고 있다. 그 가계부라고 것도 여성 월간지 신년 판 별책부록으로 주는 알록달록한 양장본이 아니고, 줄만 그어 놓은 공책을 세로로 한번 접어 쓴다. 한 달분 지출은 종이 한 장이면 거뜬히 적을 수 있다. 얇은 공책 한 권으로 2년은 족히 쓸 수 있으니 40년 살림살이가 스무 권 남짓한 가계부에 온전히 담겨 있다. 아내는 이사 때마다 낡은 공책 가계부를 신줏단지 모시듯 했다.

반면에 나는 씀씀이가 헤프다.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으면 손이 벌써 근질근질하다. 목돈이 생길 조짐이 있으면 쓸 궁리부터 하고, 상의도 없이 실행에 옮긴다. 적금 탈 때가 되면, 자가용을 집 앞에 떡하니 끌어다 놓기도 했다. 어쩌다 승진했다고 일 년 치 봉급인상분보다 더 많은 축하주를 마시고 들어오는 남편을 보고 아내는 기막혀했을 것이다. 아내는 푼돈 모아 목돈을 만들었고, 나는 아내가 애써 모아놓은 뭉칫돈을 잔돈푼으로 헤집기 일쑤였다.

다른 것이 어찌 씀씀이뿐이랴. 나는 열이 많은 체질이라 11월까지 선풍기를 창고에 들이지 못한다. 아내는 지하철 탈 때는 여름에도 스카프로 목을 감싸고 긴 옷을 여벌로 준비한다. 거실에 장승처럼 덩그러니 서 있는 에어컨은 있으나 마나 한 그림의 떡이다. 아무리 더워도 아들이나 손주가 오지 않으면 켜지 않는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내가 먹는 청양고추와 아내 전용 오이고추가 따로 있다. 나는 짠 음식과 매운 청양고추를 좋아하지만, 아내는 싱거운 것을 좋아하고 청양고추 한 조각만 베어 먹어도 속이 쓰리다고 동동거리기 때문이다. 나는 외식을 좋아하고 아내는 집밥을 좋아한다. 성격이 급한 나는 반숙, 치밀한 아내는 완숙. 이렇듯 우리는 매사에 호불호가 달랐다.

자석은 다른 극을 만나면 잡아당긴다. 우리 부부는 N극과 S극이면서도 신혼 초부터 서로 밀어내기 바빴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랐으니 바라보는 곳이 다를 수밖에 없을 테지만, ‘다름’을 ‘차이’로 이해하거나 인정하기는커녕 아내더러 바꾸라고 떼를 쓰고 버둥거렸다. 아내는 아내대로 내가 바라보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막대자석의 양쪽 끝에 서서 30년이 가고 40년이 지났다. 그렁저렁 나는 정년을 맞이했고 아내도 골다공증에 퇴행성관절염 같은 반갑잖은 친구를 하나둘 불러들이고 있다. 양쪽 끝의 자성이 시나브로 약해지더니 서로 당기고 미는 힘마저 줄어들었다. 자석의 성질을 오래 유지하려면 N극은 S극, S극은 N극과 붙여 놓아야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당기기는 고사하고 대척점에서 서로 밀어내기 바빴으니 자성磁性이 오래갈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둘의 시선은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처럼 정반대로 향하고 있었지만, 속마음까지 쫄딱 그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아내에게 먼저 다가선 건지 아내가 먼저 손을 내민 건지 알 수 없지만, 단단하던 마음이 서서히 물러지더니 동화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평생 갈 것처럼 단단했던 막대자석의 허리가 묏등처럼 구부러져 말굽자석으로 변했다.

남과 북을 향해 바라보던 시선이 동東이면 동東, 서西면 서西 어느 한쪽으로 일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눈을 부라릴 일도, 밀고 당겨야 할 거리가 시나브로 없어지고 칼같이 날카로웠던 성질도 무뎌졌다. ‘이렇게 해, 저렇게 해.’하며 다투던 것이 ‘좋은 게 좋고, 당신이 좋으면 나도 좋다.’로 바뀌었다. 왁시글덕시글 굴러오느라 서로 껴안지 못했으나 이제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남은 시간을 건너는 중이다.

쌍둥이는 그사이 소꿉놀이에 한창이다. 바닥에 내쳐진 말굽자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지그시 내려다본다. 긴 갈등과 반목 끝에 같은 곳을 바라보는 우리 부부가 얹혀있다. 구부정한 말굽자석의 허리에 청실홍실 한 타래를 훈장처럼 매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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