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글방 / 염정임

 

작가에게 그의 글방은 요새나 성城과 같은 곳이다. 그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만의 성역이며 신성불가침의 성소聖所이기도 하다. 그곳은 혼돈의 세계를 문자로 평정하려는 지난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인터넷의 시대가 되면서 작가는 자신을 그 글방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다. 노트북이라는 휴대용 컴퓨터로 어디서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페나 열린 공간에서 나지막하게 들리는 대화나 음악 소리는 오히려 두뇌 활동에 자극을 준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돈’과 ‘그녀의 방’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세기가 지난 지금 그 언설은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에든버러의 로얄 마일즈에는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를 썼다는 카페가 있다. 아이가 딸린 이혼녀로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녀는 카페의 한구석에서 환상으로 가득 찬 방대한 소설을 써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오히려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나, 자기만의 방이 아니라 상상력과 끊임없는 탐구심, 그리고 글에 대한 열망과 도전일 것이다.

 

릴케는 꿀벌이 꿀을 모으듯, 나탈리 골드버그는 뼛속까지 글을 쓰라고 했다. 글이 안 풀릴 때에 작가는 자기만의 동굴 속에서 짐승처럼 끙끙 앓으면서 뮤즈가 강림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방문을 열고 나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웃음소리와 소음 속에 자기의 존재를 던져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머릿속에서 발아를 기다리는 생각의 씨앗들에게도 맑은 공기와 햇볕은 필요하다.

 

나에게도 방은 있다. 그러나 그 작은 방에는 글을 쓸 수 있는 책상은 없다. 벽 한 면이 책장이라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고 한 칸에는 사진 앨범들도 꽂혀 있다. 그리고 매일 매일 배달되는 책들은 미처 자리를 못 잡고 방 한옆에 쌓여 있다. 그리고 잡다한 사물들, 아이들의 어릴 때의 사진, 작고하신 아버지의 사진, 문단 후배가 그려준 시화 등이 걸려 있다. 손녀들이 준 생일선물, 작은 도자기들···, 편지와 축하카드들이 든 박스도 한옆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 방은 글방이라기보다는 추억의 다락방이라고 할 수 있다.

 

책꽂이에는 장 그르니에의 『섬』, 『바다의 선물』 같은 오래된 책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85년에 나온 박경리 선생님의 『원주통신原州通信』 1986년의 『현대문학』, 문단 선후배들의 수필집들이 주로 꽂혀 있다. 나는 누렇게 바랜 책들을 다시 읽어 본다. 그리고 내 글이 실린 책은 옆모서리에 하트형의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그러나 이제 하트를 붙인 책들은 더 이상 늘지를 않는다.

 

글의 실마리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지리멸렬한 일상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이 방을 찾는다. 이곳은 현실을 뛰어넘어 나를 꿈의 세계로 이끄는 한 통로이다.

 

이 방에 들어오면 나는 방바닥에 편하게 앉는다. 다락방처럼 잡동사니가 가득한 방에서 옛날 사진들과 편지들을 보며 회한에 잠기기도 하고 그리움에 젖기도 한다.

 

이 방에서 나는 마치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아이처럼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책 한 권을 찾으러 왔다가 이 책 저 책, 그리고 사진들을 들쳐보느라고 시간을 다 보낸다. 황혼에 접어들었으니 정리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버릴 책이나 사진을 챙기다가는 다시 주섬주섬 제자리에 꽂는다. 이런 작고 오랫동안 정든 사물들 없이 앞으로 나에게 남겨질 적멸의 시간들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싶어서이다.

 

요즈음은 하루에 한 번씩 집 근처의 둘레길을 찾는다. 그곳은 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공기가 달다. 집에서 벗어나 나무 사이를 걸으며 자유로움을 느낀다. 어제저녁에는 유난히 노을이 붉었다. 장맛비가 그치고 날씨가 개면서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글이 나에게 온 지 35년이 넘었다. 이제는 내 나이도 노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되돌아보면, 지금까지 나를 지켜온 것은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