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만리 그 친구 정호경

 

내가 여기서 말하는 타향만리他鄕萬里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집에서나 술자리에서나 마음이 허전할 때 즐겨 부르던 고복수의 <타향살이>와는 다른 것으로 옛날 중학 시절 꼬박 6년 동안을 같은 학교같은 교실에서 책상을 나란히 한내가 지어준 친구의 별명이다이 노래는 1930년대에 발표된 대중가요로 짐작되는데그 구슬픈 가락이나 가사의 내용을 보면모르기는 하지만 일제의 탄압에 피 말라 가슴 여위어가던 그 당시 우리 민족의 아픔과 슬픔을 노래한 것이 아닌가도 짐작이 되지만이는 물론 일제 때 우리가 가난에 찌들었던 시대는 같은지 모르지만내가 보기에는 일제의 탄압과는 관계없이 순수한우리의 인생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나를 비롯한 친구들이 하숙방에서 공부하기 싫으면 괜히 인생을 탄식하며 불렀던 고복수의 타향살이’ 앞부분의 한두 구절을 기왕 화제에 올랐으니 여기 옮겨본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그 친구는 잠깐을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여기 번쩍 저기 번쩍 자리를 옮겨가며떠돌아다니던 역마살驛馬煞의 운명이었던가얼른 보아 집안이 어려워서 그랬던 것 같지도 않은데학교 근처에서 한 동안 친구들과 함께 하숙을 하다가도 그만두고이곳 순천에서 가까운 벌교를 지난 원창이라는 곳에서 학교까지 340분 정도 걸리는 기찻길을 아침저녁으로 새까만 석탄 연기를 마셔가며 학교를 다니던 기차통학생이었다가다가는 순천의 향교 들머리인 큰길가에 있는 우리 하숙집에 놀러 와서는 저녁밥 때가 되면처음 찾아온 하숙생 친구 대접으로 밥상에 올린 공짜 밥 한 그릇을 얌전히 비우고 가더니 나중에는 공짜 밥을 위한 의도적인 때맞춤을 위해 방과 후 어디서 혼자 남아 머무적거리고 있다가 찾아왔는지 어둑한 저녁밥 때가 되면하숙집 대문 밖에서 큰소리로 우리 하숙생 친구들의 이름을 부른다처음 한두 번은 하숙생의 친구 대접으로 하숙집 주인아줌마의 그 고마운 정이 한 그릇의 밥과 수저를 여분으로 밥상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이제는 염치가 익숙한 버릇이 되어 수시로 찾아오니 하숙집 주인아줌마가 불만스러운 소리로 우리 방 쪽을 향해 이렇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저 학생이 또 왔네오메어쩌까?”

그 뒤로도 그는 밥은 굶어도 상관없으니 친구가 좋아 매일처럼 우리 하숙집을 찾아왔다그러고는 종이봉투에 사들고 온 군고구마를 한두 개 먹고 나서는 허기를 면했는지 잠시 쉬었다가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쪽지를 끄집어내더니 적어둔 유행가 가사를 들여다보며큰 소리로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그 친구가 수시로 부르던 쪽지 속의 노래 제목은 그때 한창 유행하던 비 내리는 고모령이 아니었던가 싶다.

우리는 중학 6학년 때 '625동란'을 만나 그때 젊은 혈기로 모두 지원병을 자원해서 각자 귀가하여 부모형제들과의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라는 일주일 동안의 휴가를 마치고 학교에 가니 교무실 앞 게시판에는 이런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지금 각 학교 학생들의 자원입대자가 넘쳐서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다는 병사구사령부의 지시이니 모두 각자의 고향이나 집으로 돌아가 등교통지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그런 뒤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고향에서 피난하고 있다가 그해 10월 4개 월 만에 다시 등교통지를 받고 돌아와 대학입시 공부를 계속해서 각자의 지망 따라 각 대학으로 뿔뿔이 흩어져 떠난 것이 우리 친구들 6년 동안 중학생활의 마지막이었다.

대학을 마친 우리는 서울에서 제각기 생활터전을 잡아 결혼도 하고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중학시절부터 아주 가까웠던 친구들 여섯 명이 모여 매월 한 번씩 부부동반으로 만나 회식도 하고 지방의 명소 여행도 하며 즐기기 위해 ‘6인회란 모임을 내가 만들어 우리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그 무렵 그 친구는 자동차 부속품상을 하여 수입이 매우 좋아 생활도 풍족하여 친구들도 부러워했다그런데 그 친구 부부의 사이는 성격이 전혀 안 맞아 날마다 다투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헤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그 친구는 오래도록 혼자서 살아오다가 마침내 재산 분할까지 하는 이혼소송으로 그의 가정은 불행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나는 그 무렵 서울에서 인문고교와 입시학원에서 40년 동안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남쪽의 아늑한 어촌인 여수에 내려가 십년 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는데친구는 딸들이 사는 대전에서 혼자 셋방을 얻어 살고 있다가 옛날의 친구가 그리워서 찾아왔다면서 백발에다 초췌한 얼굴로 현관문 밖에 서 있었다그 뒤로도 몇 번을 더 찾아와서 여수의 그 유명한 게장백반이며 통장어탕도 함께 몇 번 사먹었다그러다가 언젠가 하루는 헤어지면서 손을 뜨겁게 쥐며 이것이 마지막 악수가 될는지 모르겠다며 서글픈 미소를 머금고는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나는 친구의 심각한 표정의 이 말에 놀랐지만다른 외지 친구들의 만남에서도 가끔씩 이런 말을 하기에 이 인사말도 요즘 노인들의 유행어인가 하여 예사로 들고 말았는데이 친구가 오늘 게장백반 맛에 감탄을 하더니 슬픈 반어법反語法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그의 승용차 문을 강제로 꽝 닫아 이별의 손을 흔들어주었다보내놓고 나니 대전의 셋방에서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 나이에 천릿길을 찾아 여수까지 승용차를 운전하고 친구를 찾아 왔을까 싶으니 나는 마음이 아프고 후회스러웠다그는 이혼소송으로 나눈 몇 십억의 돈더미로 방안이 그득했겠지만그보다는 중학시절의 친구가 더 좋고 그리웠던가.

그 친구는 한평생의 떠돌이였지만정이 많은 친구였다그 친구도 문학을 좋아해서 내가 새 수필집을 출간할 때마다 언제나 잊지 않고 그에게 보내주었다그런 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친구가 보낸 등기봉투가 하나 배달되었다봉투를 열어보니 다음과 같은 편지와 함께 현금 ‘1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그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네가 수필집을 여러 권이나 출판을 했어도 나는 너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해 내 마음이 편찮았는데너는 나에게 오랜 친구의 정을 잊지 않고 신간 수필집을 번번이 보내주어 늦었지만더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도록 백화점에 가서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하려고 값을 물어봤더니 자그마치 1백만 원이라고 하기에 네가 좋아하는 게장백반이나 통장어탕이라도 한 번이나 더 사먹으라고 여기 약소하지만 이 돈을 보낸다.”

그 친구는 김소운金素雲의 수필 <외투外套>를 읽었던가? ‘몽블랑’ 만년필을 사서 나에게 선물하려고 했지만값을 물어본 그는 놀라 게장백반이나 통장어탕이라도 한 그릇 더 사먹고 힘을 내라고 현금을 보낸다는 말에 나는 중학시절로 되돌아가 그의 별난 익살과 우정에 다시 한 번 찡하고 울려오는 콧등을 꾹 눌러주었다하기야 요즘은 문학작품을 원고지에 만년필이나 펜으로 쓰지 않고모두 컴퓨터로 쳐서 작성하고 있으니 그 비싼 몽블랑’ 만년필이 자칫 헛선물이 될 뻔했다는 말을 나는 맘속으로 열 번도 더 되풀이했다친구는 나의 이 수필을 읽고는 썰렁한 방에 혼자 앉아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의 글을 쥐고 얼마나 좋아할지 모르겠다. ‘타향만리’ 그 친구는 참 정겹고 고마운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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