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정재순

 

 

 

반쯤 열린 문틈으로 방 안을 살핀다어머니가 자그맣고 앙상한 몸으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다허리 한 번 필 틈 없이 평생을 밭에서 살아온 등은 한쪽으로 꾸부정하다몸가짐이 거북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 한다보나 마나 또 우수수 떨어져 있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허연 가루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앉았다 일어서면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것들은 이부자리에소파에 심지어 변기 위에도 흔적을 남긴다우리부부 침대에 걸터앉을 땐 참으려 해도 어느새 한숨이 새어나온다한동안 뵙지 못하면 안쓰러운 생각이 들다가도 막상 며칠 같이 지내면 심사가 뒤틀린다.

낙하한 것들은 곧장 쓸어 담아야 했다그냥 두면 이리저리 흩어져 집안은 엉망진창이 된다등이 가렵단 소릴 듣고도 긁을 엄두조차 못 내었다손톱에 끼일 이물질을 떠올리면 몸도 마음도 옹그려졌다어떤 대안이 있을까하고 당신을 모시고 병원에 갔더니 몸이 물기를 잃으면서 생기는 허물의 일종이라 한다.

병원을 다녀오고부터 어머니는 통 말씀이 없었다입이 깔끄럽다며 점심도 몇 술 뜨다 말았다. “허물은 무슨내가 껍데기를 벗어내는 버러지도 아니고” 구시렁대는 당신의 낯빛이 어두워 적잖이 염려되었다지나간 곳마다 눈도장을 찍으며 넌더리를 내던 나를 의식하는 듯 했다.

우연히 손위 시누이가 나직한 음성으로 어머니에게 건네는 말을 들었다고부간에 탈 없이 지내려면 들려도 못들은 체하고 보여도 못 본 척하고마음에 덜 차도 입을 닫아야 한다고 해 내 귀를 의심했다그건 오래전부터 시집살이를 시작하는 새색시가 지킬 덕목이 아니던가고부 사이가 시누이 눈에 따뜻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어머니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도 한참 거꾸로 돌아간다며 크게 역정을 냈다.

하다하다 인자 며느리 눈치를 보라꼬자슥이 숱하면 머하노문지방 넘다 두어 번 넘어졌기로서니하나같이 방 안에 가만 들안자라 카네겉몸이야 이래 볼품없지만 아즉도 맴은 까마득한데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딧더노낸들 머 쪼잔하고 너저분하게 허물을 벗고 싶을꼬시원하이 한꺼번에 홀라당 벗고소리 소문 엄시 잠결에 시르르 사라지길 비는 내 속을 누가 알것노···.”

푸념을 토하는 당신 목소리에 서운한 기색이 진하게 묻어났다.

무거운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손주들을 만나면 세상을 얻은 거 마냥 환하게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들었다새색시 적엔 순하고 낫낫해 어머니가 오시면 버선발로 뛰어나가던 내가 겨우 밥상만 들이밀고는 방을 나오기 일쑤였다부모 자식 간의 연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다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에 며칠이 지나갔다.

도깨비 뜨물에 취해 들어온 남편이 곧장 어머니가 머무시는 방을 찾았다평소 근엄하기 짝이 없던 그가 소싯적 젖 먹던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이 아닌가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허물이 덕지덕지 붙은 가슴팍에 거리낌 없이 얼굴을 묻었다일순간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막내아들과 정담을 나누는 당신 목소리에 힘이 담뿍 실렸다무춤해진 나는 거실로 나왔다.

어머니의 허물에 전혀 개의치 않는 남편 모습에 그대로 서있기가 민망했다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았다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거늘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를 못하였다그동안 어머니의 겉 허물만 보고 탓했는데 가만 생각하니 당신의 허물은 한 가지지만 내 허물은 셀 수도 없다어머니의 속을 헤아리지 못한 것도 나의 허물이다.

손수 지으신 글을 친지들 앞에 꺼냈을 때 들여다보고 한 번쯤 소리 내어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머니 생전에 읽은 적이 없었으니 참으로 무심하였다어제는 저기오늘은 여기가 아프단 끝도 없는 얘기가 듣기 거북해 마음 귀를 닫아걸었다말벗은 되어주지 못하면서 당신의 처신이 이해되지 않으면 저저이 물었고연로한 어르신의 지나친 총기는 주변인들을 힘들게 한다며 서책을 즐기는 당신을 못마땅해 했다.

모두가 남편과 인연이 닿아 시작되고 이루어진 관계이다결혼 후사는 방식과 생각이 딴판인 시댁식구와 정들이기가 수월하지 않았다섣부른 판단으로 실수를 일으키면 그가 말없이 내 허물을 덮어주어 집안에 큰 풍파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오랜만에 다니러 오신 어머니의 허물을 탐탁지 않아하는 이 좁아터진 소가지를 모를 리가 있을까.

정작 어머니의 기력이 현저히 떨어지니 그렇게 아우성치던 허물도 잦아들었다벗어낼 허물조차 없는 몸은 종잇장처럼 가벼웠다어머니의 시간이 멈추어가고 있었다그제야 알았다당신의 허물은 곤고한 세월을 견뎌낸 족적과도 같다는 것을허물벗기는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소리 없는 외침이라는 것을.

일 년에 두세 번 허물을 벗는 뱀은 한 겹 송두리째 벗어낸다몸의 성장에 맞추어 제때 벗지 못하면 자신의 피부에 갇혀 죽음에 이르는 까닭이다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은 것처럼 인간에게는 실수나 흉허물이 부지기수다뱀이 또 다른 꿈을 꾸며 허물을 벗듯이사람도 마음속 부끄러운 허물을 드러내면 가식의 꺼풀도 훌훌히 벗겨질까.

사람은 엄마 뱃속의 양수를 벗어나면서 첫 번째 허물을 벗는다그렇게 시작한 허물벗기는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으면서 계속될 것이다하지만 육체적 허물도 영적 허물도 이승의 굴레를 벗어 던지는 순간 모두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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