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주전자 한정미

주전자를 다시 꺼낸다싱크대 수납장에 버리지 않고 둔 게 천만다행이다주전자에 물을 받아 레인지 위에 올려 불을 켠다. ‘하며 불이 붙고 바닥에 열이 가해지면서 물이 조금씩 끓어오른다물 끓는 소리에 마음마저 달아오른다.

이 주전자가 내 손에 들어 온 게 언제였는지는 기억에 없다물을 끓이고 차를 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없이 좋아 전기 포트보다 주전자를 고집한다이 주전가는 한 해 두 해 함께하면서 색이 바래졌다주전자도 사람처럼 늙는가 보다새것이었을 때와 달리 물이 파르르 끓는 게 아니라 스르르 은은하게 끓는다그래서 마음이 복잡하거나 혼란스러울 때 이 주전자에 찻물을 끓인다.

시간을 더해가며 물과 차의 양을 정확히 가늠하게 되었고물이 끓어오르는 소리를 듣고도 불을 언제 꺼야하는지도 가늠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주전자는 점점 더 낡아져갔다버리라는 남편의 잦은 잔소리에 살짝 흔들리기도 했었다낡았다고 다 쓸모없는 게 아니지 않을까?

몇 달 전사업 현장에서 키 작은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규모가 제법 큰 작업 현장이라 일손이 더 필요해 인력센터에 요청을 했었다아저씨는 그렇게 해서 오신 분이다왜소한 체격에 나이도 있는 듯 하여 적잖은 실망감이 앞섰다그러나 현장은 이것저것 따질 겨를 없이 돌아가야 했기에 같이 호흡을 맞추어 갔다.

오후 들어서였다조금 떨어져 있는 그 분을 불렀다대답이 없었다내 목소리가 작은가소리를 높여 몇 번이나 불러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나이 들면 귀가 어두워진다더니 그런가바쁜 와중에 아저씨에게 가는 내 발걸음에는 짜증이 묻어났다곁에 가 팔을 툭 건드리니 그분은 놀란 듯 움찔했다.

그분은 귀가 어두워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젊었을 때부터 그랬는데 나이 들어가며 심해졌다고… 미리 양해 구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아직 누구보다 일할 수 있는데 나이도 먹은 데다 귀까지 어둡다 하면 일을 못 하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미리 알려주지 않은 것에 조금 화가 났지만너무나도 공손히 양해를 구하는 그분께 더는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하루 정도는 지켜보기로 했다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생각과는 달리 그분은 차근차근 일을 잘해 나갔다겉모습만 보고 섣부른 판단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루 일정이 끝나 갈 즈음그분과는 일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계속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승낙했다얼굴 가득 웃음 띤 그분과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내 걸음은 피곤을 잊었다.

다음 날그분은 더 씩씩했다어제 일머리를 분명히 익혔는지 하나하나 해 나가는 모습이 여간 여문 게 아니었다말도 별로 없고 묵묵히 일하는 모습에 노련미가 묻어났다.

점심시간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슬그머니 그분 곁으로 갔다때마침 커피가 먹고 싶었다며 반가이 받아 주었다향긋한 커피 내음에 그분의 이야기가 실렸다한 직장에서 몇 십 년을 일하다 정년퇴임을 하니나이 제한으로 일자리 폭이 좁아져 속상하다고 했다물건도 사람도 나이 들어 낡으면 다 소용없는 거냐며 나에게 되물었다.

그분은 살아온 시간이 있고손에 익은 시간이 있는데왜들 젊음과 새것만 선호하느냐며 푸념도 섞어 놓았다백세시대에 육십은 청년이라고 하는데정작 육십을 넘기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나이 먹은 사람은 몸은 늙었지만살아온 시간만큼 지혜가 쌓이고오래 쓴 물건은 손때가 묻었지만 애정이 더 가는 것 아니겠냐고 덧붙였다아내에게 퇴직금을 고스란히 건네주고아직은 청춘이기에 자신의 용돈만은 벌어서 쓰고 싶다며 그분은 환하게 웃었다.

그 후그분과 자주 차를 마시게 되었다두런두런 들려주는 그분의 이야기가 미더웠다나이를 먹는다고 다 서글픈 것만은 아니라고 목에 힘을 주었다한 치의 여유도 없이 아옹다옹하며 살았는데지금은 한발자국 물러나 보게 되었다고 했다발밑 현실에만 전전긍긍하느라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언제부턴가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했다그분의 말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레인지 위의 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온다올라오는 김의 양이 조금씩 많아진다이제 불을 꺼야 한다며 뚜껑이 달그락거린다불을 끄고주전자 뚜껑을 살짝 열어 김을 뺀다오늘따라 낡은 주전자에 정이 더 가는 것 같다남편 성화에 새 주전자를 샀지만 버리지 않은 게 참 다행이다낡았다고나이 먹었다고 어찌 소용없을 수 있을까잔에 물을 부으니 차가 은근히 우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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