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해 전에 매화잠을 갖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손때가 묻어있고, 문양이 약간 닳은 그런 기품 있는 매화비녀를 갖고 싶다고 썼다. 그건 비녀이기도 하지만 다시 없이 소중한 그 무엇, 생을 온통 바칠만한 그런 가치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내가 갖고 싶은 건 청자연적이었다. 해태모형, 개구리모형, 등등. 연적을 갖고 싶은 마음은 갈래머리 여고생시절 국어책에서 배운 피천득 선생의 ‘수필’에서 시작되었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이 기막힌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글씨 한 획을 그을 줄 모르고 돈도 없는 학생이 그 꿈같은 보물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참, 아니 얼마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의 세월이 흘러서 김용준 선생의 ‘뚜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를 읽었을 때 또 연적이 갖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연적을 갖고 싶어 한 마음은 두 편의 수필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가졌던 것인데 그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다만 연적을 가지고 싶다하였다.
깜냥이이란 게 있고, 분수라는 게 있다. 청자연적을 욕심내서 어쩔 것인가.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저급하나마 실제로 지필묵을 마련했던 적이 있다. 서예교실에 다닌 생각이었는데 늘 그래왔지만 여기서도 핑계를 대자면 먹고사는 일이 바빴다. 하여 차일피일하는 동안 먼지만 쌓였다가 지금은 집안 어디에 있는지 행방도 모를 만큼 완전히 잊혀졌다. 그럴듯하게 글씨를 쓰게 되면 어떻게든 연적을 가져올 요량이었겠지만 거의 망상에 가까운 희망이었다고 해야 솔직하겠다.
몇 해 전 텔레비전 ‘진품명품’에 해태모형청화백자연적이 등장해서 이제는 식어버린 연적에 대한 내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값이 엄청났다. 값은 그렇다 치고 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의뢰자는 그저 자신의 보물이 어떤 이력과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을 뿐이다. 새삼 ‘연적앓이’에 끙끙대고 있었는데 그해 생일에 딸아이가 매화문양연적을 사왔다. 이디서 샀는지, 얼마인지, 작가가 누군지 아이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쌀 한 되 살 돈도 없으면서 두꺼비연적을 사왔다고 나무라던 김용준 선생의 부인이 생각났다. 행여 있을 내 꾸지람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오, 그러나 나는 이이를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몽돌처럼 납작하고 모양에 표면이 반드르르하니 매끄럽다. 작은 주먹크기의 몸통에 주둥이선이 수려하다. 옆모습이 영락없는 오리다. 물위에 띄워놓으면 한 마리 청둥오리처럼 우아하게 유영할 것도 같다. 무엇보다 점처럼 콕콕 박힌 매화꽃잎 하나하나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각각의 꽃들은 크기와 음영, 원근이 서로 다르다. 꽃송이들은 따로따로 곱고 전체로 조화롭다. 김용준 선생의 그 두꺼비연적은 못생기기가 이를 데 없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나의 매화연적은 어여쁘기가 견줄 데 없다.
연분홍빛인가 하면 연회색인 것도 같은 조그만 자기의 빛깔, 몸통 전체에 성글지도 않고 비좁지도 않게 얌전히 피어있는 여린 꽃송이들, 그래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넘치는 호강이다. 지필묵을 다룰 능력이 없어도 그만이리. 서가에 나란히 꽃힌 책들 앞에 매화문양연적이 앉아있어서 들고나며 바라보고, 거기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니 그저 고마울밖에.
게다가 이 매화연적은 매화비녀를 갖지 못한 헛헛함을 채워 주고도 남았다. 그것이 소녀취향의 동경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지금은 매화비녀가 표상한, 지고한 가치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때문에 넉넉한 마음이 된다. 쓰다듬고 바라보는 내 마음은 그러므로 세상 모든 고귀하고 숭고한 것 앞에 진정으로 무릎 꿇는다.
꽃들과 새들, 자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곳 앞에 고개 숙인다. 인간의 정신과 손길로 빚어낸 모든 창작물 앞에 겸허해진다. 그런 마음이 되는 까닭은 생명을 가진 글 한 편 쓰고 싶다는 소망을 결코 버릴 수 없어서이다. 매화문양연적이 그 소망을 상징한다.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귀하다.
아침에 J선생이 꽃봉오리가 조롱조롱 맺힌 한 뼘 길이의 매화꽃가지를 몇 개 꺾어다주셨다. 매화가 피면 옛 선비들이 술이 익었다고 벗을 부르는 것처럼, 선생은 해마다 내게 매화소식을 그렇게 전해주신다. 몸집이 통통한 유리병에 물을 채워 꽃가지를 꽂아두고 바라본다. 매화를 바라보면서 매화연적을 이야기하는 이 시간, 어이없게도 내가 매화처럼 고결하고 격이 높은 사람이라도 될 것 같은 즉거운 착각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