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이 있는 말/정민
때로는 침묵이 웅변보다 더 힘 있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시시콜콜히 다 말하는 것보다 아껴 두고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직접 말하는 것보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더 좋다. 시 속에서 시인이 말하는 방법도 이와 같다. 다 말하지 않고 조금만 말한다. 직접 말하지 않고 돌려서 말한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대신 스스로 깨닫게 한다.
멀리 함경도 안변이란 곳에 벼슬 살러 가 있던 양사언이 한양에 있던 친구 백광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오랜만에 친구의 편지를 받은 백광훈은 반가워서 편지 봉투를 서둘러 뜯었다. 그런데 편지가 좀 이상했다. 다음과 같이 딱 한 줄, 한문으로는 열두 자만 씌어 있었던 것이다.
삼천 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답니다.
옛날에는 편지도 직접 사람을 보내 전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낸 편지가 받을 사람에게 도달하는 데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 먼 길에 그렇게 힘들게 보낸 편지인데, 고작 열두 글자만 썼다니 이상하다.
한참 그 편지를 읽어 보던 백광훈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양사언은 이 편지에서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편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먼저 그는 삼천 리 밖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밝은 달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달은 구름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하다. 환한 달빛을 보고 싶은데 구름이 자꾸 방해를 한다.
그는 왜 달빛과 친하게 지낸다고 했을까? 달은 내가 있는 이곳이나 네가 있는 그곳이나 똑같이 뜰 것이다.나는 여기서 너를 생각하면서 저 달을 본다. 너는 또 내가 보고 싶어서 달을 보겠지.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만나 볼 길이 없어서 매일 저 달만 쳐다본다. 그런데 그 달마저도 구름에 가려서 보일 듯 말 듯하니 너무 안타깝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양사언은 백광훈에게 멀리서 나는 네가 보고 싶어 죽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길게 안부를 묻고 보고 싶다는 말을 적은 편지보다 훨씬 더 깊은 정이 느껴진다. 이 편지를 손에 들고 달을 올려다보며 친구 생각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을 백광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직접 다 말해야만 좋은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고, 속으로 고여서 넘치는 정이 있다.
다음은 조선 시대 능운이란 기생이 사랑하는 임을 그리며 지었다는 <달을 기다리며〔待月〕>란 한시다.
달 뜨면 오시겠다 말해 놓고서 (郞云月出來 랑운월출래)
달 떠도 우리 임은 오시지 않네. (月出郞不來 월출랑불래)
아마도 우리 임 계시는 곳엔 (想應君在處 상응군재처)
산이 높아 저 달도 늦게 뜨나 봐. (山高月上遲 산고월상지)
임은 달이 뜨면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저 달이 중천에 이르도록 임은 오실 줄을 모른다. 그녀는 저녁 내내 조바심이 나서 달만 보며 마당에 나와 서 있다. 왜 안 오실까? 저 달을 못 보신 걸까? 혹시 마음이 변하신 것은 아닐까? 조바심은 점차 불안감으로 변해 자칫 그리움의 원망이 쏟아지고 말 기세다.
그러나 그녀는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오지 않는 임에게 푸념을 늘어놓는 대신 오히려 임의 편을 들어 주기로 한다. 아마 지금 임이 계신 곳에는 산이 하도 높아서 내게는 훤히 보이는 저 달이 아직도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모양이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임이 내게로 오시지 않을 까닭이 없다. 설령 임이 나와의 언약을 까맣게 잊고 안 오시는 것이라 해도 나만은 이렇게 믿고 싶다. 여기에는 또 혹시 이제라도 오시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바람도 담겨 있다. 임을 향해 직접적으로 원망을 퍼붓는 것보다 은근한 표현 속에 읽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더 큰 매력이 있음을 느낀다.
황희가 정승이 되었을 때, 공조판서로 있던 김종서는 태도가 자못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의자에 앉을 때도 삐딱하게 비스듬히 앉아 거드름을 피웠다. 하루는 황희가 하급 관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김종서 대감이 앉은 의자의 다리 한쪽이 짧은 모양이니 가져가서 고쳐 오너라.”
그 한마디에 김종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크게 사죄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뒷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육진(六鎭)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오는 속에서도 조금도 두려운 줄을 몰랐는데, 그때 황희 대감의 그 말씀을 듣고는 나도 몰래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었네.”
정색을 한 꾸지람보다 돌려서 말한 한마디가 거만하기 짝이 없던 김종서로 하여금 마음으로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게 했다.
다음은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이 지은 <산중문답(山中問答)>이란 작품이다.
나더러 무슨 일로 푸른 산에 사냐길래 (問余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웃으며 대답 않았지만 마음만은 한가롭다.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불답심자한)
복사꽃이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내려가니 (桃花流水杳然去 도화류수묘연거)
인간 세상이 아니라 별천지이다.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산에서 사는 나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불쑥 묻는다.
“왜 이렇게 깊은 산속에서 사십니까?”
나는 싱긋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산이 좋아서 사는 사람에게 산에 사는 이유가 달리 있을 까닭이 없다. 산이 좋은 까닭을 말로 설명할 재주도 없지만, 말한다 한들 그가 알아듣기나 하겠는가?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답답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한가롭다.
고개를 들어 둘러보면 강물 위에는 복사꽃이 둥둥 떠내려간다. 인간 세상에는 달리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도 그는 나더러 왜 답답하게 산속에서 혼자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웃는 것 외에는 대답할 방법이 없다. 이것은 침묵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추사 김정희의 글에 이런 것이 있다.
작은 창에 햇볕이 가득하여,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한다.
책상 하나만 놓여 있는 방안으로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볕이 고마워서 말없이 오래도록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물질의 풍요로움은 비록 지금만 못했지만, 정신만을 넉넉하고 풍요로웠던 선인들의 체취가 문득 그립다.
출처-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