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을 기다리며 구활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란 시 한 수를 싣고 서쪽으로 달린다. 서해가 가까운 어느 포구로 가면 눈이 펑펑 쏟아지는 시의 마을을 만날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아직 영하 10를 오르내리는 정월이지만 눈 한 톨 내리지 않았다. 마침 뉴스에서도 남도 쪽에는 눈이 오고 전국적으로 눈 아니면 비가 온다고 했으니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는 상태다.

나는 왜 올해 들어 유난히도 눈 오기를 기다리는가. 텔레비전에서 눈 소식이 전해지기만 하면 엉덩이를 들썩거렸지만 흩날리는 눈 구경만 했을 뿐 파묻히는 폭설에 취하지는 못했다. 눈 속에 고립되면 지겹도록 불편하고 두려운 건 사실이다. 그런데 왜 눈에 갇히지 못해 이렇게 안달하는가. 그건 아마 이런 시 한 편이 주는 감동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중략)/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다섯 도반들의 남도여행 첫 시동을 아침 6시에 걸었다. 경상도의 도계를 넘어 전라도로 진입하면 산천의 색깔과 느껴지는 기운이 달라진다. 우선 전라도 쪽에는 길가에 정자가 많고, 조상의 무덤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런 정자 터와 묫자리는 우리 같은 도시의 노마드(nomad)들에겐 정말 맞춤한 식사 장소여서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곳이다.

광주를 지나 나주로 내려가는 길섶의 산천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곳의 수은주도 영하의 기둥을 붙들고 영상으론 죽어도 못 올라가하며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목으로 버티고 있는 나무들의 가지에는 벌써 알듯 모를듯 푸른 기운이 내비치고 있다. “겨울이 오면 봄이 그리 멀겠는가라고 읊은 P. B. 셸리 선생의 말씀이 새삼스럽다.

달리는 차창에 비치는 원경 속의 문필봉과 무덤들은 마치 기하 노트를 펼쳐 놓은 것 같다. 그건 삼각형과 원이었다. 문득 이등변 삼각형의 두 변 길이는 한 변의 길이보다 길다는 기하 선생님의 가르침이 생각나 혼자 웃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이란 책은 모두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던 갈릴레이 말이 그렇게 절실하게 와 닿을 수가 없었다.

그래, 맞다. 신이 만든 이 세상은 온통 통일된 기호로 표현되어 있구나. 그리고 종족 간의 언어 또한 전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듣기에 구별하기 좋도록 장(chapter)별로 파트를 다르게 묶어 놓은 것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삼라만상의 비밀과 우주의 신비까지도 이 기호만 알면 쉽게 풀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순전히 의식의 호작질이다. 점심을 먹기로 되어 있는 법성포에 도착할 때까지 아궁이 앞에 앉아 불장난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생각을 노리개 삼아 지루하지 않은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이번 나들이의 아홉 끼 식사 중 단 한 끼만 법성포 굴비정식을 사 먹기로 했다. 물어물어 찾아간 전문집이 법성포 터미널 옆 007식당이었다. 1인분 2만원짜리 굴비정식에 딸려 나오는 반찬이 너무 많았다. 조기찌개, 병어조림, 홍어삼합, 게장, 장어구이, 갈치구이, 간재미무침을 비롯하여 다른 반찬들도 갯내음 솔솔 나는 것들로 밥상이 비좁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굴비백반이나 시킬 걸 하고 넋두리를 하며 앉아 있으니 백반 시키면 이런 반찬 누가 준대하고 티방을 준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리는데, 쌓일라나 모르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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