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식탁과 꽃 한 송이 / 구 활

 

 

 

 

꽃은 먹어서 배부른 음식은 아니다. 그러나 꽃은 음식 맛을 부추기는 향료나 고명과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걸 공연 예술에 대입하면 백 댄스나 배경음악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허브 식물의 꽃잎 즉 비올라, 나스터튬, 임파첸스 등을 밥 위에 얹어 꽃 밥을 만들어 먹는 걸 보면 이젠 꽃도 음식 반열에 오른 것 같다.

꽃을 급수로 따지면 밥이나 향보다는 몇 수 정도 높은 것 같다. 신라 향가에 나오는 헌화가를 보면 산중 늙은이가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에게 절벽 위의 꽃을 꺾어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하필이면 왜 꽃을 꺾어 마음을 표시했을까.

송강의 장진주사에도 꽃 이야기가 나온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그려. 이몸 주근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혀 묶여가나 떡갈나무와 백양나무 숲에 가기만 곧 가면 누런해 흰달 가는비 함박눈 소소리바람 불제 뉘 한잔 먹자할꼬.” 노인의 정표였던 꽃이 시대가 바뀌면서 술자리의 주판으로 둔갑하여 술 한 잔이 꽃잎 하나로 계산된다.

그러다가 근세로 접어들면 꽃은 꽃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이미지가 바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김춘수의 시 ‘꽃’)

여자의 변신은 무죄이듯 꽃의 변신도 무죄인가. 여행 도반들은 꽃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남다르다. 바닷가 여행 중에 길거리 식탁을 차리더라도 꽃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는다. 생선회를 뜨는 와중에 쑥부쟁이나 개망초라도 한 송이 꺾어와 소주병에 꽂아야 비로소 주회(酒會)가 시작된다. 꽃과 함께하는 식탁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풍류지만 그건 어쩌면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진정 어린 기도가 아닐까.

도반들은 꽃에 대한 정성도 지극하지만 스스로를 치켜 세우는 존심(尊心)이 곧 자존(自尊)임을 안다. 가령 자동차 한 대에 네 사람이 타고 여행을 떠날 경우 신분을 나타내는 사회의 직함을 호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운전하는 이는 기장, 옆자리 앉은 이는 부기장(별명`내비게이션), 뒷자리에 앉은 이는 사무장과 스튜어디스라 부른다.

차를 항공기로 격상시키고 보니 도반들 모두가 근사한 승무원 직책을 얻게 된 것이다. 마크 트웨인이 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란 소설에나 나올 법한,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지만 늙은 아이들도 때론 ‘동화 속의 소년’으로 돌아가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다.

거제도 남부면 어느 정자나무 그늘에선 코스모스로 곧 신부 입장이 있을 식장처럼 장식하고 멋진 ‘풀밭 위의 식사’를 즐긴 적도 있다. 또 장승포 선착장에선 고기상자 식탁을 인근 텃밭 꽃들로 치장한 후 생선회를 뜨고 있으니 지나가던 어부들이 “회는 제대로 잡수실 줄 아시네요” 하고 축원해 주었다.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이해인의 시 ‘꽃 멀미’)

꽃 멀미 속에 사람 향기나 맡으며 그저 외롭지 않게 황혼을 맞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