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 박남수(1918∼1994)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방공호 위에
어쩌다 된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호 안에는
아예 들어오시질 않고
말이 숫제 적어지신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
(중략)
글쎄 할머니,
그걸 어쩌란 말씀이시오.
숫제 말이 없어지신
할머니의 노여움을
풀 수는 없었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이제 지구가 깨어져 없어진대도
할머니는 역시 살아 계시는 동안은
그 작은 꽃씨를 털으시리라.
너무 많은 일을 해서 몹시 지쳐 있으면 위로를 바라는 마음조차 가질 수 없다. 무슨 바람을 가질 힘조차 없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일을 했는데도 아직 일이 한참 밀려 있으면 손발이 잘 움직이질 않는다. 생각만큼 잘 해내지 못하는 나를 탓하게만 된다.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일상은 잔잔해 보인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그 내면에도 절망은 수시로 찾아온다.
그럴 때 갑자기 찾아오는 위로는 감사하다. 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갑자기 꽃잎이 떨어져 내리듯, 마음에 내려오는 위로는 고맙다. 그중에서 내가 들었던 가장 고마운 위로는 우리가 생명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지구에 떨어져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생명체. 시간과 힘과 능력에서 한계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등바등 살려고 애쓰는 생명체가 가엾고, 기특하고, 장하고, 애틋하지 않을 수 없다. 박남수의 시에 보면, 전쟁으로 거칠어진 땅 위에서 반대로 작은 생명을 지키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전쟁은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고 주장한 사건이고, 할머니는 그 반대에 위치해 있다. 우리의 일상은 어느 편일까. 부디 전쟁 같은 일상이 아니라 꽃씨 같은 일상이 되길 바란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