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팽개친 선물
정순진
수련이 피기 시작한 초여름, 울퉁불퉁 주름진 연잎이 나타났다. 병들었나, 생각했다. 며칠 뒤에 보니 그 잎이 멋대가리 없이 커졌다. 병든 건 아닌 듯해 돌연변이인가 싶었다. 연이 두 포기, 수련이 여덟 포기 자라는 연못은 자연 못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마감한 인공 못이다. 수련이나 연도 직접 흙바닥에 뿌리를 내린 게 아니고 분에 심겨 있다. 어찌 무성하게 자라는지 분을 꺼내 뿌리의 반은 캐내 버리고 퇴비를 넣어주는 일이 봄을 맞는 우리 집 첫 행사이다. 수련은 꽃 핀 지 삼 일만 지나면 물속에 고개를 박아버린다.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참 결연하다. 물속에서 썩어가는 시든 꽃과 잎을 따느라 쭈글쭈글한 연잎이 뒤집혔는데 보기만 해도 무서운 뾰족뾰족한 가시가 수도 없이 났다. 그러고 보니 울퉁불퉁한 표면에도 가시가 많았다. 못 본 사이 그런 연잎이 몇 개 늘었다. 주름진 연잎을 뚫고 꽃대가 불끈 올라왔는데 이 녀석도 가시투성이다. 제가 제 잎을 뚫다니 안쓰러웠다. 이파리는 연못이 좁다고 아우성치듯 면적을 넓혀갔다. 꽃은 아주 볼품없었다. 그렇게 이파리가 크니 소담스런 꽃이 필거라 기대했던 모양이다. 정교한 수련과 크고 우아한 연꽃 사이에서 가시투성이 꽃대에 매달려 벌어지다 만 보라색 혹덩어리는 꽃이라 하기엔 민망하고 괴이쩍었다. 남편은 군데군데 누룻누룻하고 갈라진 채 계속 연못을 덮어가는 수상한 돌연변이 연잎을 싫어했다. 그래도 꽃은 어떤지 궁금해 기다렸는데 꽃마저 괴기하자 없애자고 했다. 나도 열 개의 분에서 나온 잎과 꽃이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에서 혼자 물 포면을 다 차지하려는 듯 기세를 넓혀가는 가시와 주름투성이의 연이 못 마땅했다. 우린 모처럼 의기투합해 가시에 찔려가면서도 그 큰 잎을 모조리 가려내 잘라 버렸다. 초록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늦가을, 식물도감을 보다 기겁했다. 사진 속의 꽃이 더 크긴 하지만 우리가 애써서 없앤 그 꽃과 비슷했다. 이파리를 보자 똑 같았다. 아니, 그럼 그 귀하다는 가시연꽃! 그랬다. 백 년에 한 번 피어서 그 꽃을 보기만 해도 행운이 온다는, 1속 1종만 있어 귀하다는,꽃말이 청순한 마음이라는, 멸종위기에 놓여 있어 보전우선순위 1순위라는 가시연꽃을 사투라도 벌이듯 낑낑대며 없애 버린 것이다. 아무리 귀한 선물을 줘도 받는 사람 안목이 형편없으면 이런 꼴 나고 만다. 지금도 우리는 모른다. 그 가시연이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지. 우리가 아는 건 다만 보전 1순위라는 존재를 우리가 나서서 무참하게 무질러 버렸다는 것, 아니 무지른 게 아니라 무찔러 버렸다는 것.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식물도감에서 가시연꽃을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정작 가시연이 내게로 왔을 때는 알아보지 못했다. 책에서는 꽃을 크게 확대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실제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꽃은 책에서 보다 훨씬 작았고, 잎은 훨씬 컸다. 처음 동물원에 갔을 때 놀라던 딸아이가 떠오른다. 기린이나 사자나 토끼가 비슷한 크기로 그려진 책만 보다가 정작 실물을 대하고는 어리둥절해하며 아니라고 울던 모습. 책과 실물의 차이, 이미지와 실재의 차이. 오십 년 동안 수없이 겪고도 여전히 그 차이를 뛰어넘지 못하고 책에만 갇혀있는 아둔한 어리보기. 무식보다 더 큰 문제는 고갈된 상상력이다. 어느 날 가시연이 내가 발 딛고 노니는 뜨락의 연못에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에, 와서 자신의 전 존재를 보여주어도 알아보기는커녕 존재 자체를 파내 없애버린 것 아닌가. 그 행위의 중심엔 내 소유의 땅엔 내가 심고 가꾸는 풀만 자랄 수 있다는, 아니 자라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오만이 자리하고 있었던 거다. 땅은 언제 어떤 씨앗이 날아와도 다 품어서 키워내는 것을. 그런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면서도 어찌 그리 땅의 원리를 외면하는지. 내 힘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먼지보다 작은 세계를 우주의 전부로 여기다니, 우물 안 개구리가 코웃음 칠 일이다 아흐, 얍삽하고도 얍삽한 자신에게 실망하여 한숨이 신음처럼 터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선물을 물건으로만 생각해 비슷한 가치를 지닌 물건으로 보답하는 걸 예의로 여긴다. 이른바 교환의 세계. 요즘엔 아예 물건도 귀찮다며 돈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선물은 가치가 한정되어 있는 물건이 아니다. 물건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어떤 정신적인 에너지이다. 하물며 자연에게 받은 선물임에랴. 화수분을 받아놓고도 투박하고 못생긴 그릇이라고 내팽개쳐 깨버렸으니…. 받아 놓고 선물인지도 모르고 내팽개친 존재가 어디 가시연뿐이겠는가. - 정순진 에세이 [괜찮다, 괜찮다]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