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 김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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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만나면 좋은 사람을 만난 듯 더없이 기쁘다. 잘 아는 사람이 좋은 글을 썼을 때는 그의 깊은 속을 새삼 발견한 듯 정이 쏠린다. 글은 사람이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모두 항상 좋은 사람은 아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언제나 착한 사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엔가 고운 마음이 있듯이, 좋은 글 쓰는 사람에게는 어디엔가 좋은 데가 있다.
좋은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 천성이 착하디 착하여 악의 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은 아마 좋은 글을 쓰기 어려울 것이다. 감명 깊은 글이란, 보통 사람들과 같이 약점과 치부를 수없이 가진 인간이 스스로 반성하고 자기의 현재를 극복하고자 몸부림치는 가운데 자연히 생기는 내면의 기록일 경우가 많다.
좋은 글은 남에게 명령하거나 충고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 반성한다. 좋은 글은 남의 약점을 나무라기에 앞서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으로 동정한다. 전혀 반성할 여지가 없어 완전한 인물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르나,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없다.
언뜻 보기에 좋은 글 같으나 사실은 별로 그렇지 못한 글이 있다. 언뜻 보기에 좋은 사람 같으나 사실은 대단치 않은 인물이 있는 것과 비슷한 사정이다.
좋은 글을 만나면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염원이기보다도, 아름다운 것 또는 뜻있는 것을 만들어 내고 싶은 창작의 소망이다.
좋은 글을 쓰고자 애쓰는 순간 마음은 자연히 가다듬어진다. 좋은 글에 대한 염원이 곧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결과로 이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필자 자신의 마음의 갈피를 정리하기에 귀중한 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글을 읽고 얼굴이 붉어질 때가 있다. 오래 전에 쓴 글이 매우 유치하다는 것을 발견할 때 부끄러움에 책을 덮어버린다. 그러나 정말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은 제가 쓴 글 가운데 의외로 좋은 말이 발견되었을 경우에 있어서다. 그 좋은 말에 어울리는 실천이 없었음을 반성하고 부끄러움을 금치 못할 경우도 있고, 옛날 그 수준의 글을 요즈음은 쓰지 못한다는 후퇴감에 마음이 괴로울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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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은 '수필' 또는 '수상'으로 불리는 부류의 글이다. 아래위로 정장을 하고 격식을 따라서 거동하는 공식 회합에서보다도 내의 바람으로 꾸밈새 없이 행동하는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람됨의 본색이 더욱 잘 나타나듯이, 형식에 구애 없이 가볍게 쓴 수필 가운데 의외로 필자의 인품이 역력히 나타나곤 한다. 특별한 전문적 지식과 관계없이 여러 분야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수필이 사람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 준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근자에 수필이 많이 쓰이고 읽히는 가운데 '수필다운 수필' 또는 수필의 문학성(文學性)에 관한 논쟁이 일부 평론가들 사이에 활발함을 본다. 그러한 논쟁이 우리 나라 수필의 수준을 높이기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면서 이른바 '수필론'을 관심 깊게 살펴 보는 축이다.
모든 평가의 기준이 그렇듯이 수필에 관한 평가의 기준도 시대 정신 또는 민족 정신을 반영하여 형성되는 것으로 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문화적 상황은 하나로 통일된 시대 정신 또는 민족 정신이 지배하기보다는 여러 갈래의 이질적인 사상들이 엉켜 있는 상태이므로, 수필에 관한 이론에도 자연 여러 가지 견해의 대립을 본다. 수필 문학을 위한 하나의 권위 있는 평가의 척도가 확립되기를 고대하는 사람이기는 하나, 무리하게 조급한 결정을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본다.
어떠한 수필이 가장 좋은 수필이냐는 물음은 백화가 만발한 화단 가운데 무슨 꽃이 가장 아름다우냐는 물음과 같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수필과 꽃은 경우가 반드시 꼭 같지는 않겠지만, 수필의 평가에 있어서도 기호(嗜好) 또는 주관(主觀)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은 일단 수긍해야 할 것이다.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입니까?'라고 묻는 것보다는 '당신은 어떤 수필을 좋아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이 훨씬 알기 쉽고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다. 다만,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수필은 객관적으로 좋은 수필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 까닭에, 저 두 가지 물음은 결국 같은 물음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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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인지를 말할 수 있는 조예(造詣)에 이르지 못하였다. 다만 내가 어떤 수필을 좋아하는지는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수필보다도 좋아하지 않는 수필을 말하기는 더욱 쉬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좋은 수필에도 여러 가지 유형(類型)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필에는 반드시 정서가 담뿍 담겨 있어야 한다든지 또는 반드시 해학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은, 국화는 반드시 꽃송이가 커야 한다는 주장과 같이 편벽된 듯하여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에 내가 어떤 수필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내 개인의 기호를 말할 뿐이요, 그 밖의 것들은 좋지 않다는 뜻은 전혀 담지 않았다.
나는 필자의 개성이 뚜렷이 나타난 수필을 좋아한다. 생면부지의 필자이지만 글을 읽으면 그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개성이 뚜렷한 수필이 좋다. 흔히 남들이 한 말을 또 한번 늘어놓은 것 같은 싱거운 글은 끝까지 읽기가 지루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교를 부리거나 자아(自我)를 과장한 글에는 호감이 가지 않는다. 전에는 '수필의 본질은 자아의 표현'이라는 말에 잘못 이끌려 의식적으로 자아를 강조한 글을 좋아한 때도 있었으나, 요즈음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글에는 반드시 진실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세를 부리거나 솔직하지 못하여 마치 자기는 이미 인격의 완성 단계에 도달한 듯 위선적인 글은 읽기에 역겹다. 대단치도 않은 학식을 가지고 크게 많이 아는 양 현학적인 글도 비위에 거슬린다.
민속의 지도자로 자처하면서 설교를 늘어놓기에 바쁜 글은 더욱 호감이 가지 않는다. 내가 쓴 것 가운데 그런 것이 발견될 때는 당장 책을 덮어버린다. 글에 교훈을 담는 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교훈은 간접적인 것이 바람직하며 마지막 판단은 독자 자신이 하도록 여운을 남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나는 생각이 깊은 글을 좋아한다.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독자와 함께 깊이 생각하는 자세로 쓰인 글에 호감이 간다. 우리가 흔히 당하기 쉬운 삶의 슬픔 또는 괴로움을 자기의 체험을 통해 진실하게 그린 글, 특히 슬픔이나 괴로움을 이겨 나가고자 하는 용기를 조심성 있게 보여주는 글에 공감을 느낀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나게 감상적이거나 자기 도취에 빠진 글에 대하여는 상이 찌푸려진다.
품위 있는 해학을 여기저기 엮어 넣은 글은 언제 읽어도 마음이 흔쾌하다. 자기 자신의 실패나 슬픔을 가벼운 웃음으로 처리한 마음의 여유를 읽는 것도 기쁘거니와, 각박하고 부조리한 세태를 동정 섞인 유머로 둥글게 나무라는 독기 가신 비판 정신을 읽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저속한 익살이나 가시 돋친 냉소에 대하여는 저항을 금치 못한다. 해학의 극치는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되 자애의 정신을 잃지 않는 건강 속에서 발견된다. 남이 웃음의 대상이 될 경우에는 따뜻한 사랑으로 그 웃음을 배상할 때 비로소 유머의 경지에 도달한다.
나는 짧고 간결한 표현 속에 은근한 함축이 담긴 글을 사랑한다. 산문시(散文詩)라고 불러도 좋을 그러한 글에는 현대시에 흔히 보이는 난해성도 없고 자기 도취에 빠진 아류 문필의 지루함도 없다.
그러나 지나친 억제로 인공(人工)이 압도하며 분재(盆栽)와 같은 인상이 강한 글을 최상급으로 찬양하는 견해에 대하여는 회의를 느낀다. 소재(素材)에 따라서는 분재를 다듬는 수법으로 처리하는 것이 적합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자연림(自然林)에 가까운 광활한 정원의 미(美)를 따르지 못한다.
나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글을 좋아한다. 가을 하늘처럼 맑고 진달래처럼 산뜻한 글도 좋지만, 심산유곡을 원경(遠景)으로 그린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꿈 같은 글은 더욱 매혹적이다. 현실이 각박하면 각박할수록 마음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꿈의 언어가 고맙게 느껴진다.
그러나 알맹이 없는 생각에 연막을 쳐서 굉장한 사상을 가장하는 속임수는 환각제 못지않은 죄악이라고 믿는다. 내가 여기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글'이라 함은, 무당의 굿과 같은 모호한 언어의 유희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진실을 지향하는 구도자(求道者)다운 정신의 영감 서린 문장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평이한 문장의 글을 좋아한다. 쉬운 말로 쓸 수 있는 내용을 굳이 난잡한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어딘지 현학적인 것 같아서 정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쉽게 풀어 쓰기 위해서 말수가 많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문장은 평이하고도 간결한 것이 상품이다.
언뜻 보기에 평범한 것 같으나 새겨 읽으면 인품의 세련됨을 느끼게 하는 그런 글이 좋다. 겉으로 재치가 흐르는 글보다는 안으로 덕성(德性)을 숨긴 글이 더욱 값져 보인다.
표현의 아름다움과 사상의 심원함을 아울러 가진 글이라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언제나 두 가지가 다 충족되어야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사상에 새로운 점이 없더라도 표현이 참신하면 그런대로 찬양할 일이요, 비록 문장에 미숙한 점이 있더라도 사상에 심오한 경지가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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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많이 읽히지 않는 세상인데 글 이야기를 썼다. 별로 관심거리가 될 성싶지도 않은 '글에 관한 글'을 쓴 것은, 좋은 글이 많이 쓰이고 또 많이 읽히는 풍토가 되기를 염원하는 조그만 마음에서이다.
수필의 전문가도 못 되면서 수필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문외한인 주제에 수필 이야기를 쓴 것은 전문가 못지 않게 수필을 사랑하는 마음이 분수를 잊게 한 때문일 것이다.
글이라는 것을 많이 읽을수록 좋은 것일지는 의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아마 글도 알맞게 읽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요즈음같이 바쁜 세상에 글만 읽을 수도 없을 것이며, 독서 이상으로 긴요한 활동의 분야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사회가 좀더 책을 읽어야 한다는 여론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며, 그 여론이 여론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에 반영되기를 바라는 마음 절실하다.
우리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책을 읽어야 한다. 제한된 시간과 도서비 안에서 시시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좋은 책만을 골라서 읽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많이 읽느냐 적게 읽느냐 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현재 상당히 많은 책이 출판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좋은 책보다 흥미 위주의 서적들이 많이 나오고 있으며, 그런 것들이 많이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개탄할 현상이다. 흥미 본위의 책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양서(良書)가 밀려나는 것이 안타깝다는 뜻이다.
좋은 글이 실린 좋은 책이 많이 나오고, 그것들이 널리 읽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는 것은 나 한 사람만의 심정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