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집 / 조현미 

 

호박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그 집이 있던 자리에, 노을이 짙게 비낀 꽃은 붉다. 꼭 조등弔燈 같다.

천생이 직립과는 먼 넝쿨에게 콘크리트 담벼락은 숙주가 되기엔 여러모로 옹색해 보인다. 어쩌다 수라修羅같은 콘크리트 틈새에 뿌리를 내렸을까. 갈지자로 굽은 그루가 영락없는 골절의 흔적인데 크낙한 잎사귀 사이 애호박을 조랑조랑 달고 있다.

넝쿨의 여정 말미엔 넝쿨손이 바랑 하나 걸머메고 있다. 한 모금의 햇살과 바람, 한 치의 행로를 향한 저 가없는 탁발, 빈손이 못내 안쓰럽다.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식물에게나 삶은 어차피 구도求道의 연장선상이 아니겠는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으나 늘 위태위태한 넝쿨의 처소를 보면 운명이란 신이 정해주는 것도 아니지 싶다.

그 집을 처음 본 건 십여 년 전 늦은 여름께였다. 무심코 길을 지나는데 한 채의 초록이 눈에 들어왔다. 잿빛 도로와 고층 아파트, 엉성한 가건물 틈에 오두막 한 채가 엎드려 있었다. 가구 전시장 한쪽에 굴 껍데기처럼 붙어 있는 집이었다. 한길로부터 등을 돌린 그 집엔 창문도, 번지조차 없었다. 호박 넝쿨로 무성한 지붕이 언뜻 공중에 뜬 섬 같았다.

집 모퉁이를 돌아, 길고 좁은 텃밭을 끼고 스무 발짝쯤 걸었을까. 시늉뿐인 나무 대문이 나타났다. 성근 옥수수 이파리 너머 그 집의 알몸이 한눈에 들어왔다. 토란잎 아래 낮볕에 불콰한 맨드라미와 봉숭아, 앉은뱅이 채송화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댓돌 위 가지런한 고무신 한 켤레가 불현듯 옛집을 호출했다.

그날 이후 그 집은 내 의식 안에 세를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 집의 한 귀퉁이에 똬리를 틀었는지도 모르겠다. 옛집을 등진 이후 단 한 번도 고향 닮은 풍경을 그저 지나치지 못했다. 지붕에 마루에 담장이며 장독에 삶의 때가 반질반질한 고택을 볼 때마다 송두리째 풍경을 훔쳐 오고 싶은 열망에 시달리곤 했다. 도심盜心이란 굳이 물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 집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차들이 씽씽 오가는 한 귀퉁이에서 호박이랑 깻잎 따위를 파는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지날 때마다 허공이 한 번씩 크게 출렁거렸다. 지상에 머무는 시간보다 허공에 떠 있는 날이 많은 오른쪽 다리 탓이었다. 충직한 왼쪽 다리가 한 발자국 앞서 불편한 다리를 마중했지만 무게중심은 일찌감치 주인의 의지를 벗어나 있었다. 채소를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끄는 모습이 영락없이 격랑을 만난 한 채의 집이었다. 갸우뚱한 중심을 부축해 줄 피붙이 하나 없는 걸까? 유난히 깊게 패인 한쪽 발자국에 생의 무게가 고스란했다,

거의 매일 아침, 할머니를 만났다. 왕복 6차선 도로를 끼고 아파트와 마주하고 있는 산은 넌출 같은 비탈길을 두르고 있었다. 그곳엔 하늘의 뭇별이 죄다 마실을 온 듯 호박꽃이 지천이었다. 된비알을 기어오르는 모습이 곡예처럼 아찔해 아침부터 멀미가 났다. 손수레에 물이 가득한 고무 통을, 때론 거름을 담아 아슬아슬 도로를 건넜을 것이다. 산자락을 에돌며 생의 물꼬를 낸 뒤 오두막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알전구에 호박꽃 같은 불이 들어오면 손수 쌀을 씻어 혼자만의 끼니를 준비했을 것이다,

할머니와의 앎에 하루가 더하면서 해묵은 추억에도 시나브로 움이 텄다. 마음에 빈터가 많은 이들은 끊임없이 몸을 놀리는 것으로 생각의 잡초가 자랄 틈을 두지 않는다. 내 할머니가 그랬다.

칠십여 년을 지탱해오던 시골을 떠나 도시로 온 뒤에도 농부로서의 관성은 할머니를 떠나지 않았다. 호미가 지난 자리마다 푸른 이랑이 넘실거렸다. 동심원의 넝쿨손들이 한 뼘씩 허공을 밀어 올리며 사다리를 놓았고 대화의 물꼬를 텄다. 한 접시의 호박 부침개와 한 줌의 호박잎이 무시로 인정을 담아 날랐다. 그러나 아주 오래 허공을 이웃해 온 넝쿨 손도 십여 층의 아파트까진 미치지 못했다. 흙에서 멀어지면서 할머니의 일상은 급속도로 푸석해졌다. 삶의 알곡을 고스란히 자손들에게 내어 주고 쭉정이만 남은 할머니께 고층 아파트는 한 채의 섬이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와의 인연이 열한 살을 넘은 작년 겨울께, 가구 전시장 안팎이 사뭇 소란스러웠다. 포클레인이며 불도저가 토구처럼 땅을 들쑤시고 딱정벌레 같은 덤프트럭이 연일 흙을 퍼 날랐다. 얼마 후, 몇 채의 건물이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옛집을 빼닮은 그 집도, 할머니의 소소한 일상도 땅속 깊이 매몰되었다.

한동안 할머니에 대한 말이 무성했다. 손수레를 두고 간 것으로 보아 자식들이 모셔갔을 거라고 입을 모을 뿐, 아무도 할머니의 거취를 알지 못했다. 이웃들의 회억은 한결같이 따뜻했지만 마음은 어째 윗목처럼 싸늘했다. 불빛을 흘려보낼 창문 하나 달지 못한, 인정 한 모금이 절실했을 당신께 그들 모두 이방異邦이었을 뿐, 누구도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리지 않았다.

이듬해 봄, 할머니의 비탈밭이 마냥 늑장을 부리고 있다. 매년 그맘때면 부지런히 호미를 놀려 흙의 힘을 북돋을 주인을 잃은 탓이다. 웃자란 잡풀 틈에서 햇살 한 자락, 관심 한 모금이 고픈 넝쿨손이 빠끔 고개를 내밀고 있다. 머잖아 비탈밭과 더불어 산으로 편입될 운명,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음이 못내 안쓰럽다.

가구 전시장이 있던 자리엔 빌라 네 동이 들어섰다. 한 채의 건물이 콘크리트 바닥에 그토록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곳에 한때 인정이 고픈 오두막이 웅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드물다. 지극한 슬픔도 세월이 쌓이면서 바래는 법, 아직 의식 안에 기거 중인 할머니와의 추억 또한 언젠가는 계약 기간이 완료될 것이다.

물미역 같은 어둠이 내리자 집들이 하나둘 불빛을 단다. 세상의 모든 저녁이 불빛 아래 비로소 환해진다. 산다는 건 어쩌면 누군가를 위해 불빛 하나 내거는 일, 가슴에 섬 하나 없는 이는 모른다. 저 불빛이 누군가에겐 집어등이고 등대이자 북두칠성이라는 것을. 파랑을 헤치고 뭍으로 오를 수 있는 힘은 불빛 한 점으로부터 연유함을.

할머닌 지금쯤 거처를 마련하셨을까? 더러 할머니 집 방문을 두드렸더라면, 그 긴 밤들이 조금쯤 환해졌을까. 망망한 일상, 흙냄새에 몸살을 앓을지라도 부디 생의 끈을 바투 잡고 계시기를,

끝인 듯하면서도 시작인 넝쿨의 궤적은 종시終始의 연속이다. 악착스레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넝쿨을 가만 땅바닥에 뉘어준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면 수직이 아니라 수평인들 어떠하리. 삶이란 어차피 오체투지의 연속이거늘.

자꾸만 손을 까부르는 넝쿨손을 애써 외면하며 지나친다. 유난히 붉은 저 호박꽃이 그 많은 섬과의 안녕을 고하는 조등이길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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