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가 필요해요-한 켤레의 양말처럼 살자

모드 루이스의 사랑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그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캐나다에 행사가 있어 토론토에 갔다가 그곳 문인들과 함께 클라인버그(Kleinburg) 지역의 맥마이클 미술관(McMichael museum)에 들렸다. 숲속에 위치해 산책하면서 조각상들을 구경할 수 있는 한적한 곳이다. 유럽 전통적 스타일을 배제하고 캐나다 자연을 새로운 회화 스타일을 창조해낸 그룹인 `7인의 예술가(Group of Seven)' 활동지라고 한다.

 

  인디언들의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공예품을 보고 다음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엉거주춤 서서 어색한 미소를 띤 여인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모드 루이스다. 혹시나 하고 둘러보니 전시된 작품 안에 무지갯빛의 밝은색이 물결쳤다. 그녀가 맞다. 자신이 살았던 캐나다 남동쪽의 노바스코샤라는 작은 어촌마을을 화폭에 담은 나이브 화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나이브(naive) 화가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채 기존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소박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는 예술가를 말한다.

 

  몇 년 전 모드의 삶을 다룬 에이슬링 월시 감독의 영화 '마우디(Maudie-한국 영화는 내 사랑)' 를 보고 감동을 받았는데 이곳에서 그녀의 작품을 만날 줄 몰랐다. 모드는 어릴 적부터 앓아온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다리를 절었다. 부모가 사망 후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립하기로 한 그녀는 생선을 파는 에버렛 루이스가 가정부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순수한 심성을 가진 모드는 가정부로 일하며 구박을 받으면서도 에버렛의 집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렸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벽이며 계단과 빈 깡통 등 붓 하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그려냈다. 자투리 종이와 판자에는 수선화와 나비로 장식하고 창틀에 그려진 새는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길가에 자리한 초라한 오두막집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가득 채워 넣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기교를 부리지 않은 순수한 그림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투박하고 거친 남자와 몸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여자. 영화는 두 사람의 어설프고 삐꺽거리지만, 운명 같은 사랑을 무심한 듯 툭툭 그러나 섬세한 솜씨로 그려냈다. 모드는 나이가 들어 기형이 심해져 등이 굽고, 손과 팔이 비틀려 붓을 쥐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가난했지만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떤 순간에도 행복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며 산 용감한 여인은 그녀의 소원처럼 한 켤레의 양말처럼 살았다. 그림자 없이 강렬한 색으로 가득한 모드의 그림은 점점 유명해져 부통령 리처드 닉슨까지 그녀의 그림을 샀고,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집 앞에 그림 팝니다.’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작은 액자 속의 모드를 만나니 영화의 장면이 떠올라 그림 하나하나가 정겹다. 한 칸짜리 작은 오두막집의 창으로 바라보는 밖의 세상은 그녀의 전부다. 아카시아 골짜기의 작은 다리와 시냇물, 튤립밭의 고양이, 그늘 밑 소 그리고 어촌답게 하얀 팔각 등대가 빨간 지붕을 달고 서 있고 갈매기가 날아다닌다. 특히 눈 덮인 들판을 달려가는 마차와 빨간 지붕의 집들은 크리스마스 카드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고 해도 될 정도다. 두 마리의 사슴이 초록빛이 물이 잔뜩 오른 나무 밑에 그리고 단풍나무를 배경으로 또 눈 쌓인 길 위에 서 있다. 소의 다리가 두 개나 세 개만 그린 것도 있고 긴 속눈썹에 뿔이 양쪽에 뾰족한 게 어색했다. 흰색 고양이 세 마리 또 검은색 고양이 세 마리가 꽃나무 밑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장한 듯 털이 곤두섰다. 비슷한 배경에 같은 동물이 그려진 액자를 세 개씩 나란히 진열해 놓아 마치 다른 곳 찾는 게임을 하는 것처럼 같은 듯 다른 묘한 분위기다.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는 그림 속에 그녀의 마음을 찾으려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바라봤다.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몸이 불편해 자유롭게 다닐 수 없기에 작은 오두막 안에서 창밖의 세상인 마을 언덕, 바다와 동물 등 일상을 종이나 과자 상자에 자신의 꿈을 표현했다. 눈길을 달리고 싶고, 아름다운 꽃으로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갈매기 되어 훨훨 날고 마차를 타고 마을의 교회에 갈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린 소의 다리가 세 개면 어떻고 겨울 눈 속에 단풍나무가 있다면 또 누가 뭐랄까. 사슴이 달리는지 누워 있는지 분명치 않다고 고개를 갸우뚱할 이유가 없다. 불평이나 원망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밝게 표현해낸 그녀의 마음이 귀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부모와 함께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때로 회귀하고 싶은 발버둥은 아닐까 하는, 그래서 어린아이다운 풍으로 그려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드의 작품을 보는 내내 마음을 슬그머니 찾아든 이름이 있다. 같은 지역이어서 때문일까. 빨간 머리 앤이다. 새하얀 팔각 등대와 빨간 지붕과 파란 하늘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곳은 <빨간 머리 앤>의 저자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가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모드의 그림에서 빨간 머리 앤이 살던 초록색 지붕 집, 우체국, 학교 등 보였다. 머리 위에는 눈같이 새하얀 향기로운 꽃들이 둥근 천장처럼 길게 뒤덮고 있었다고 앤은 초록 지붕 집을 향해 마차를 타고 가며 말했다. 해가 돋을 때 깨어나 수면위로 급강하하거나 온종일 아름다운 푸른 하늘을 날다가 밤이 되면 자기 둥지로 돌아가는 일은 신나는 일이라며 갈매기가 되고 싶어 했다. 빨간 머리 앤의 천진난만하고 어떤 상황이든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모드의 메시지와 닮았다.

 

  <에반젤린>은 롱펠로가 노래한 아카디아 소녀의 이름이다. 사랑하는 연인 가브리엘을 잃어버린 소녀가 사랑을 찾는 내용으로 이 시는 롱펠로의 친구인 나다니엘 호손이 들려준 이야기에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담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노래다.

 

  앤의 천진난만과 에반젤린의 진정한 사랑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피어난 예술가들의 혼이다. 아름다운 사계절의 색깔이, 구불구불 난 길 사이의 아담한 집들이 담은 많은 이야기를 그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작품 안에 녹여 냈다. 감동에 젖어 있는 나에게 함께 간 언니가 모디의 화보 책을 사주며 오늘의 느낌을 글로 쓰고 했다. 모드를 가슴에 꼭 안았다. 그녀가 붓 한 자루를 소중히 손에 잡고 온몸을 움직여 한 줄 한 줄 힘겹게 이어나간 희망과 사랑이 나에게 전해지는 듯했다. 큰 숙제를 받았다. 우연히 만났기에 더욱더 반갑고 가슴을 큰 북으로 친 것 같은 울림이 왔다. 그림을 가르쳐 줄 수 있냐는 물음에

"나는 그림을 가르칠 수 없다.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기 때문에 누구를 가르칠 수 없다."라고 답했다.

 

  몸도 불편하고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에게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라고 말했다. 그 당당함이 부럽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는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닮고 싶다. 작은 숲속에 위치한 미술관에서 거대한 거인을 만났다. 기회가 된다면 모드가 살던 곳에 가 보고 싶다. 그곳에 빨간 머리 앤도 에반젤린도 있으니 감동이 세배일 터이다. 모드가 결혼식 날 신혼여행 대신 에버렛이 끄는 수레에 앉아 뒤틀린 양팔과 부러질 듯 앙상한 다리를 벌리고 바람을 맞으며 미소를 짓던 그 길을 달려보고 싶다. 세상을 품에 안은 듯 커 보이던 그녀의 행복을 나도 느껴보고 싶다. 갈대숲에 이는 바람과 흰 눈으로 뒤덮인 오두막집에서 모드가 그렇게 원하던 덧문을 열고 따뜻한 차를 나누자고 하면 두말없이 들어가 수선화가 그려진 벽을 등지고 앉아야지.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는 빨간 머리 앤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며 손을 흔들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모드의 그림을 알아주고 세상에 알린 산드라는 말했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세요. 당신의 시선을 보고 싶어요."

 

  나는 당신의 그 의지를 닮고 싶고 또 필요하다고 고백하면서.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내 삶을 풀어낼 그 길 위에 조심스레 한 발자국 걸친다. 글을 쓰는 나에게도 최대의 과제이고 화두다. 자신의 마음을 읽고 표현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