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종이 신문과의 정겨운 재회

이현숙 / 수필가
이현숙 / 수필가 

[LA중앙일보] 발행 2020/12/10 미주판 23면 기사입력 2020/12/09 18:54

상큼한 잉크 냄새가 방안을 순간에 점령했다. 얼마 만인가. 아침 일찍 앞마당을 청소하던 남편이 기다란 봉지를 가져와 내게 주었다. 신문이다. 정기구독을 신청했는데 벌써 왔나 보다. 신문을 펼치는데 특유의 냄새가 호기심을 자극하려 코를 간지럽히고 눈을 가득 채운 활자들로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분명 오늘 아침에 인터넷으로 제목을 보아 아는 내용인데도 처음 접하는 느낌이다.

집에서 받은 신문은 감회가 새롭다. 1980년대에는 한인 라디오 방송국이 생기기 전이라 한글로 된 신문은 세상의 소식을 편안하게 만나게 해주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다행히 한인들이 근처에 많이 살아서인지 아침에 집으로 배달됐다. 앞마당에 툭 하고 던져주면 아침 잠이 없는 시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들여왔다. 일하러 가는 준비에 바쁜 내 등 뒤로 그분은 커피잔을 앞에 놓고 여유롭게 밤새 벌어진 세상사를 점검했다.

나는 집안 서열로 꼴찌라 일터로 나오며 챙겨온 전날 배달된 구문이 내 차지다. 일하다가 틈틈이 한 자 한 자 놓치지 않으려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세일 광고를 섭렵하고 관광회사가 광고하는 여행지를 마음속으로 따라가며 위안을 받았고, 구인구직난까지 보며 만약 내가 새로운 직장을 찾는다면 어떤 직종이 어울리고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상상놀이도 했다. 넘기며 펼치고 접어가다 보면 신문은 이미 내 안에 다 입력이 됐다.

요즘은 인터넷이 넓게 보급돼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지구 반대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실시간 중계가 된다. 나도 하루에 몇 번씩 무료로 설치한 애플리케이션으로 뉴스를 보며 신속하고 간단한 정보를 즐긴다. 원하지 않는 광고 배너가 떠서 방해를 받기에, 마음에 드는 기사만 골라 읽거나 헤드라인만 보고 내용을 짐작한다. 인터넷으로 읽다가 필요한 기사가 있으면 지인에게 부탁하든가 귀찮지만 30분 거리의 LA 한인타운 신문가판대까지 가서 샀다.

이제 편히 앉아 신문을 펼친다. 컴퓨터 모니터나 휴대폰 화면을 늘려가며 보는 뉴스보다 종이에 인쇄된 신문은 내용에 집중하기가 쉽다. 원치 않는 광고는 건너뛰면 되니 강제성 없고 한 눈 안에 펼쳐지기에 인터넷에서 놓칠 수 있는 정보도 얻는다. 또 중요한 부분을 표시하거나 필요한 부분을 오려서 스크랩할 수도 있고 한눈에 밑단의 광고까지 훑는다. 가로 세로로 난 낱말 퀴즈를 풀며 아리송한 단어를 헤집고 찾느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런 재미를 잊고 지냈다니.

인쇄 냄새 풍기며 소식을 전해주고, 지식을 얻었던 종이 신문을 다시 대하니 정겹다. 정확한 정보를 자세한 보도와 분석으로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면 종이 신문이 적격이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전자책 때문에 종이책을 읽지 않는다고 불평하는데 신문도 마찬가지다. 종이의 매력이 묻히고 있는 현실이 슬프다.

남편은 한글을 읽지 못하니 눈치 볼 것 없이 신문은 내 차지다. 따끈한 커피와 잉크 냄새가 신선한 신문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니 마음이 느긋하다. 요즘처럼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을 때, 세상을 후다닥 눈으로 삼키기보다는 천천히 곱씹으며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느림의 미학이란 단어는 이럴 때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