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고통이 남기는 교훈들

이현숙 / 수필가
이현숙 / 수필가 

[LA중앙일보] 발행 2020/09/17 미주판 17면 기사입력 2020/09/16 17:20

순간의 실수로 종아리를 데었다. ‘앗! 뜨거워’라는 느낌이 30초도 안 걸린 것 같은데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사작용으로 움직였다. 손바닥만 하게 벌겋게 부어올랐다. 열기가 다리 전체로 번졌다.

옆집 친구인 로울데스의 아들 윌리가 두 달 전에 모터사이클을 샀다. 연습 삼아 동네 한 바퀴 돌고 집 앞에 세워둔 것을 모르고 내가 장난삼아 올라앉았는데 달궈진 머플러에 종아리가 슬쩍 닿으며 화상을 입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남편과 로울데스 부부는 내 비명에 놀라 달려왔다. 아픈 것도 잠시 창피해서 별일 아닌 듯 내가 먼저 웃으며 넘겼다.

얼음찜질하고 알로에베라의 점액을 베어서 붙이고 잤다. 아침에 거즈를 열어보니 콩알만 한 수포가 잔잔하게 꽉 들어찼다. 날씨가 100도를 넘어 더운데 종아리까지 욱신욱신 쑤시고 화끈거리며 다리의 피부가 땅겨 걸을 때마다 아팠다. 무릎까지 통증이 느껴졌다. 근처 약국에 가니 약사는 연고를 추천해주며 물집이 터지지 않게 조심하고 진물이 나면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차에 타는데 다리가 의자를 스치며 몸에 소름이 확 돋게 아팠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하늘이 온통 잿빛이다. 자동차로 10분 거리인 LA다운타운의 고층 건물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태양이 그 안에 사로잡혀 제구실을 못 하고 불그스름하게 그림자를 만들며 미로에 갇힌 듯하다. 차 유리창에는 뽀얗게 재가 내려앉았다가 차가 달리자 이리저리 날아갔다. 하늘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인 연기로 공기의 질은 역대 최악을 기록해 집안에서도 마스크를 썼다. 공기 청정기가 품절 현상이라고 했다. 연기와 잿더미가 LA와 오렌지카운티 등으로 바람을 타고 확산하면서 폐를 손상할 만큼 심각한 대기 오염을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에 이어 대기오염이라는 고통으로 우리를 당황케 한다.

차 안의 라디오에서는 캘리포니아 등 미국 서부 해안의 3개 주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이 점점 더 확산하며 사망자가 30명을 넘어섰다는 뉴스가 나왔다. 대형 산불로 매연이 뒤덮이면서 진화와 실종자 수색 작업이 어렵다고 했다.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

오래전에 읽은 책 ‘지선아 미안해’가 떠오른다. 20살의 여대생이 오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음주 운전자로 인해 일곱 대의 차량과 부딪치고 전복되는 사고가 나며 3도 중화상을 입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았으며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며 이겨냈지만, 얼굴과 팔 등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 주인공이 사고를 겪기 전의 사진과 사고를 당한 다음에 찍은 사진들이 나와 비교해 가며 읽었던 기억이 났다.

화상은 통증의 고통도 컸지만, 상처가 아물고 난 후 남은 흉터로 인해 겪은 심적 고통을 신앙의 힘과 ‘사고를 당했다’가 아니라 ‘만났다’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이겨낸 감동적인 내용이다. '당했다'는 상대에게 피해를 보아 원망이 들어 있지만, 스치고 지나는 우연이든, 언제인가는 꼭 연결되는 필연이든 '만나다'는 것에는 희망과 함께 헤어진다는 숙명도 있다.

요즘 코로나19와 화재로 우리는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니 어서 떠나갔으면 좋겠다. 손바닥만 하게 부풀어 오른 내가 입은 화상도 2차 감염이 되지 않도록 약도 바르고 조심해도 흉터로 남겠지만, 곧 가라앉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화끈거리고 아프다.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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