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나누는 사람/ 이현숙
봄비가 내린다. 잿빛 하늘은 때론 강하게 또 약하게 빗줄기를 뿌렸다. 단비다. 메말랐던 대지도 어깨를 벌리고 기지개를 켠다. 누렇게 말라가던 앞뜰의 잔디는 뻐끔뻐끔 물을 삼키느라 바쁘고 소나무는 뾰족한 잎을 곧게 세우고 목욕 중이다. 지붕에 멈추었다가 방울방울 떨어지며 만든 리듬이 경쾌하다. 제각각의 위치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봄을 맞는다. 오랜만에 찾아온 활기찬 아침인데 나는 창밖의 세상으로만 느껴졌다.
넋 놓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친구다. 자주 대화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지만, 온아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안부를 묻다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뜬금없이, 음치인 데다가 생뚱맞게 전화기에다 대고. 내 대답을 무시하고 그녀가 선창했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얼떨결에 나도 더듬거리며 따라 불렀다.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중간중간 끊어지다 이어지며 노래를 마치자 둘은 약속이나 한 듯 까르르 웃었다. 어느새 내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피어나고 가슴이 뛰었다. 이 노래를 언제 마지막으로 불렀던가. 그 시절로 돌아가 우산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가 발이 젖는 거 신경 쓰지 말고 물웅덩이에 첨벙첨벙 뛰어볼까. 인생은 진흙탕 속 같다는데 앞뒤 계산하고 재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마음을 졸이는 중이었다. 며칠간의 고민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동안 튕겨 나가니 축 늘어졌던 몸에 활기가 돌았다.
그 친구가 나에게 우산이 되어 주었다. 우산을 펼치면 그 공간에서는 비바람을 막아주고, 따가운 여름의 햇볕에도 그늘을 만들어 더위를 잠시 피하게 해준다. 때론 얼굴을 얼게 만드는 눈송이로부터 추위를 막는다. 그 작은 울타리는 보호막이 되어 살펴주고 지켜준다. 그 안은 내 편이다. 살다가 지치고 버거울 때 세상의 비바람에서 지켜줄 우산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어느 시인은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꼭 우산뿐이겠는가. 주위를 돌아보면 마음의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힘을 주기도 하고, 말없이 건네는 차 한잔으로 마음에 온기가 가득 차 오르기도 한다. 아니면 내 친구처럼 아무 말도 묻지 않고 목소리를 만으로도 아픔을 알아채고는 함께 소리 내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젖지 않게 보호해주는 우산이 되고 싶다. 나는 내 방법대로 다친 감정을 다독이고 쓸어 안아주는 글을 쓰고 싶다. 단 한 줄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남아 힘들 때 떠 올려진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