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순이의 눈물
아래 눈꺼풀에 콩알 크기의 점이 하나생겼다. 염증이 가라앉으며 그곳에 검은 딱지가 자리를 잡았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썹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시야를 반쯤 가렸다. 얼마나 갑갑한지 떼어내고 싶어 손이 수시로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억지로 참고 있다. 저절로 떨어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흉터가 남는다니, 그나마 피부도 곱지 않은데 더 보탤 수는 없지 않은가. 손님들은 나를 점순이라고 부르며 놀렸다.
한 달 전쯤이다. 눈 밑이 발갛게 변하고 스멀스멀 따끔따끔 아파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래끼가 났다. 다음날 아침에는 눈꺼풀이 서로 딱 붙어서 겨우 물로 축인 후 떼어 내고 보니 가관이었다. 잡지의 광고란에서 많이 애용하는 ‘Before & After’를 연상케 한다. 얼굴 반쪽이 퉁퉁 부풀어 올라 있었다. 염증이 뺨 부위로 내려와서 그렇단다. 안과에서는 약을 먹으면서 기다리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하니 시간이 약인가보다. 눈이 발갛게 되고 눈곱도 끼니 추접스러워 보이기에 돋보기로 사용하는 안경을 쓰고 일을 하러 갔다.
눈이 아프니 귀도 잘 안 들리고 머리까지 아파 일하기에 불편했다. 보는 이들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소금물을 끓여서 솜을 적신 후 눈에 대라고 했다. 다래끼가 난 부분의 눈썹을 떼어 길가의 돌멩이 위에 올려놓으면 발로 차고 가는 사람이 눈병을 가져 갈 것이니 그렇게 해보라고 했다. 옛 어른들의 지혜와 유머가 돋보이는 민간요법이다. 눈썹을 뺌으로써 그 부분의 염증이 터져 밖으로 나오니 가라앉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안약을 넣으려 거울을 본다. 나의 빨간 눈동자에 작은 아들 Kenny와 친정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래 그랬지. 작은 아들 Kenny는 어릴 적에 유난히 눈병을 자주 앓았다. 얼마나 아프고 불편했을까. 눈을 깜빡일 때마다 빨간 물감이 주르륵 쏟아져 내릴 듯해 손으로 받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래끼도 눈꺼풀의 일부인 양 끊이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상담시간에 왕따는 아니지만 아들의 눈을 무서워하는 급우들이 있단다. 혹시 본인 스스로 위축될 것을 걱정했다. 눈이 시뻘건 간 덩어리 같다는 어른들의 성화에 아동병원 눈 전문의를 찾아갔다. 유난히 길고 처진 눈썹이 깜박일 때마다 얼굴에 있는 기름기를 안으로 묻혀 들여 생기는 일종의 알레르기 증상이란다.
일에 시달리느라 옆에서 돌봐주지도 못했다. 겨우 전화로 큰 아들에게 시간 맞추어 동생의 눈에 약을 챙겨 넣어주라는 당부만 했다. 눈에 약을 넣을 때면 아들은 따가워서 펄쩍펄쩍 뛰어 올랐지만 병이 난 것이 아니라 알레르기라는 것에 안심을 한 것인지 무심했다. 심해졌다 가라앉고 또 다시 그러기를 반복했지만, 그저 그런가 보다 곧 났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엄마는 결혼하기 전으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유치원 교사로 일할 때였다. 여름 장마철에 지독한 아폴로 눈병이 유행처럼 돌았다. 한 원생이 수영장에 갔다 온 후 눈병을 앓더니 개나리반 아이들이 하나씩 아프다가 결국 나도 옮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썹들끼리 밤새 단합대회를 했는지 붙어서 뜰 수가 없었다.
눈 안에 왕 모래가 한 움큼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엄마는 소금물을 엷게 끓여서 눈을 닦아 주고, 양치물과 세숫물도 방안에 앉아서 받았다. 선풍기 바람은 좋지 않다며 연신 부채질로 더위를 내 주위에서 몰아냈다. 음식도 비린 것과 기름진 것은 안 된다며 밥상에 올리지 않았다.
엄마의 정성에 눈병도 물러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동안 밀린 일과 친구들 만나는 재미로 바쁘게 지냈다. 며칠 뒤 엄마도 눈병을 심하게 앓았다. 괜찮다는 엄마의 한마디가 면죄부가 되어 그런가보다 지나갔다. 그 이후로 엄마는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안경을 쓰셔야 했다.
엄마와 나, 그리고 나의 아들 Kenny. 내리사랑이라고 하는데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어디에 흘려버렸나. 백분지 일도 안 되는 것을 주며 엄마라는 이름만으로 아들에게 생색내며 살아 온 것은 아닐까. 가제 수건으로 덕지덕지 붙은 눈곱을 닦아 주지도 못했다. 김이 솔솔 오르는 따끈한 밥에 얼음 동동 띄워 시원해진 오이지 한쪽 올려 주지 않았다. 수박씨를 젓가락으로 골라내어 손에 쥐어 주지도 못했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에 돌봐주지 못한 것도 미안했다. 그런데 눈병이 차츰 간격을 두고 찾아온 사춘기 때 부모의 불화로 아들은 더욱 힘든 시간을 견디어 내야 했다. 이혼 후 큰언니 집에 머물고 있는 나를 찾아와 일주일에 두 시간정도 같이 보내곤 했다. 돌아갈 때면 그의 두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담긴다. 깜빡이면 주르륵 떨어트릴까 봐 눈에 힘을 주어 크게 뜨고 입을 꾹 다문 채 마주보려하지 않았다.
눈에 약을 넣을 때마다 따갑고 쓰라려서 펄쩍 뛰어오르던 아들에게 더 고통스러운 눈물이 고이게 한 것이다. 그 시리도록 아픈 눈물은 내 마음을 할퀴어 상처를 내면서 조금만 더 참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를 하게 만든다. 어설프게 흔드는 손길은 아쉬움이 긴 꼬리를 달고 있기에 차가 사라진 뒤에도 쉽게 그 자리를 떠나 집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었다. 아들들이 다녀간 날이면 언니 몰래 이불 속에서 숨 죽여 한참을 운다.
아픔 때문인지 아니면 아들의 슬픈 눈이 떠올라서인지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약을 넣어야 했기에 얼굴을 닦아내다가 실수로 그만 검은 딱지를 건드렸다. 떨어뜨렸다. 아, 점 대신 그 자리에 흉터가 남겠네. 어쩐다. 그래도 아들의 가슴에 남긴 상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 시간이 흘러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어른들의 세상을 그도 겪겠지. 부모들이 왜 그럴 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때쯤에는 그 흉터도 사그라지지 않을까. 그의 눈 알레르기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Kenny의 눈에 행복이 차오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