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네비게이션

 

지하철 1호선 안이다. 마주 앉은 승객들은 어디에선가 만난듯한 정겨움이 느껴진다. 25년만의 고국 나들이 중이다. 오늘은 남편과 덕수궁을 구경하고 언니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매번 움직일 때마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태워다 주고, 우리가 볼일 볼 동안 기다려 주는 일이 부담스러웠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다고 했다. 교통체증이 심하고, 주차하기 힘든 도심에는 버스나 전철이 제격이라고 우기니 지하철 노선표를 구해 주었다.

자신 있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자동 매표기 앞에서부터 난감했다.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본 어떤 부부가 표 사는 방법과 입구를 알려 주었다. 전철을 기다리며 중간에서 갈아타야 할 곳까지 가는 게 맞는지 신문을 보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또 물었다. 그분도 같은 방향으로 간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덤으로 억새풀 축제를 하는 난지도의 하늘공원과 광화문 앞 수문장 교대식도 볼만하다며 세세한 정보를 주었다. 친절하게 길 안내를 받으니 외국인인 남편에게 아내의 나라 좋은 일면을 보인 것 같아 자랑스러웠다. 남편은 ‘휴먼 네비게이션’을 만나니 길을 잃지 않을 것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네비게이션. 서울에서 여러 친지들의 차를 타보았다. 대부분이 네비게이션을 이용한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입력하면 가야 할 곳을 지도로 알려준다. 친절한 음성이 어느 정도의 앞에서 좌회전을 해야 하는지, 전방에 방지 턱이 있거나 사고 다발지역이니 주의하라고 꼼꼼히 챙긴다. 경로를 이탈해도 바로 수정해서 알려준다.

아는 길인데도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기에 꼭 그래야 하는지 물었다. 교통 단속 구간이나 무인 카메라의 위치를 알려주어 교통티켓 방지용으로 사용한단다. 또 장거리 운전 중에는 졸음을 막을 수 있고, 자주 가는 곳이 아닐 경우에는 새로운 도로가 생기기도 해 혼란을 막을 수 있단다. 초보운전자나 초행길에는 좋은 길 도우미가 되어 준다. 길눈이 어두운 길 치들에게는 필수품이리라. 차를 타면 자동으로 들리는 그 목소리가 이제 익숙하다. 목적지까지 빠르고 정확히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 생활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문명의 이기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도 지혜다.

삶에도 네비게이션이 적용 할 수 있을까? 살아가는 모습과 환경이 다르기에 길 안내처럼 정해진 답은 없다. 일률적으로 지정해 주는 길을 갈 수 없으니 자신이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목적지가 분명해야 중간에 다른 길로 들어섰더라도 바로 제 길을 찾아 들것이다.

돌아보면 평탄대로로 달려가는 삶을 살지 못했다. 타인의 길이 더 넓고 안전해 보여 따라가다가 내 길이 아님을 알고 돌아서 오느라 시간을 허비 하기도 했다. 언덕을 오르다 지쳐서 주저 앉기도 했고, 늪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했다. 막다른 골목길에서 주저 앉으며 좌절도 했고, 낭떠러지 앞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싸 안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이런 것이 인생이겠지. 일사천리로 사는 삶은 무의미하고 건조하리라 위안을 삼는다.

시행착오 뒤에 건진 잔잔한 삶의 묘미도 만날 수 있었기에 후회하지 않다. 간혹 엉뚱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해도 새로운 곳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마침 그곳에 목을 축일 수 있는 옹달샘이 있거나 나무 그늘이 있어 한 숨 돌린 날도 있었으니까. 밀리는 곳에서는 인내심도 키우고 나만의 공간 안에서 홀로 생각을 정리 할 수 있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 비록 잘못 들어서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에서는 놀이기구를 탄 느낌이 들었다면 너무 비약한 것일까?

오늘 만난 휴먼 네비게이션은 하루를 행복하게 해 준다. 삶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들을 정에 담아 나누어주는 미덕이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준다. 미처 모르던 정보도 나누어 주고 때론 길동무가 되어 무료함도 날려 보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자신의 작은 수고로 타인이 즐거울 수 있다면 그도 보람된 삶을 사는 것이리라. 나도 오늘 만난 사람들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야지.

처음 타 보는 지하철이라 걱정이 되는지 남편은 노선표를 열심히 들여다 본다. 한국어와 영어로 하는 방송을 귀 기울여 듣는다. 나는 지나 가야 할 역들을 하나하나 집으며 그에게 알려준다. 그러다 깨닫는다. 우리는 남은 삶을 살아가며 서로에게 길 안내를 해주어야 하는 휴먼 네비게이션이 되어야 함을. 지금처럼 지도를 펼쳐 놓고 가야 할 곳을 의논하고 정해야 하는 삶의 동반자임을.

우리가 지하철을 갈아타야 할 왕십리 역에 다다랐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최소한 한번 정도 더 길 안내를 받아야 할 지도 모르는데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될까 기대된다. 남편의 손에는 서울 곳곳을 다닐 때 필요할 지하철 노선표가 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