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토네이도


 

남편은 소주를 좋아한다. 그만큼 소주를 마시는 과정도 한국적이면서 신성하기까지 하다. 먼저 소주병을 들면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오른다. 손목을 이용해 병을 좌우로 힘차게 흔들다가 멈추면 병 안에 기포가 생기고 회오리가 일어난다. 소주와 공기가 섞여 돌돌 말리며 흔들리는 모습에 그의 어깨가 으쓱, 자랑스러운 몸짓이다. 병뚜껑으로 레몬의 꼭지 부분을 돌려 구멍을 낸 후, 소주잔에 몇 방울 떨어뜨린다. 레몬 향이 소주 특유의 냄새와 맛을 희석해서인지 부드럽다. 건배를 청하고 한 잔 쭉 들이켜며 ‘Bottoms Up’ 외친다. ‘캬아’ 짧은 감탄사가 그의 입에서 나온다.

남편은 남미계 피가 섞인 미국인이다. 그가 소주의 맛을 알게 된 것은 오빠 때문이다. 만나면 주로 저녁 식사와 함께 소주를 마시다 보니 마니아가 됐다. 오빠가 기울이는 잔의 속도에 맞추지 못해 힘들어했는데 이제는 나름의 요령이 생겨 여유도 부린다. 남편은 소주 두 병으로 자신의 양을 정해 놓았다. 더 마시고 싶을 땐 윙크에 애교를 부리며 ‘Uno mas, uno mas(한 병 더 한 병 더)’를 부르짖는다. 회오리 만드는 법을 핸드폰에 저장해 둘 정도로 좋아하니 어찌 그 요청을 나 몰라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술보다는 술자리를 좋아한다. 같이 어울리다 보니 나도 물이 조금은 들었다.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 칵테일 한잔에 손톱 밑까지 빨갛게 변해 ‘토마토’란 별명을 남편이 붙여 주었다. 연애할 때도 데이트 비용이 적게 들어 좋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잔을 빨리 비우지 못해 얼음이 녹아 ‘술이 물인지, 물이 술인지’ 선을 그을 수 없이 되어버리지만, 삶이 녹아들은 듯해서 좋아한다.

술을 앞에 두면 때론 오해가 풀리고 서먹서먹했던 막이 걷히기도 한다. 알게 모르게 쌓였던 스트레스가 알코올에 용해되면서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작은 농담도 몇 배의 큰 웃음이 되어 돌아오고 안주 삼아 살짝 곁들이는 짙은 농담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 내가 설 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필요하면 숨을 곳을 제공해 준다. 턱없는 용기를 불러오는 마력에 빠질 수 있다. 살짝 나사가 풀린 듯해도 술기운 탓이라는 방패 막을 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삶, 가끔은 자아를 내려놓고 약간의 옆길로 들어선들 무슨 대수리.

남편 덕에 술에 대한 안목도 높아졌다. 무더운 여름날이나 땀 흘리며 일한 후 마시는 한 모금의 시원한 맥주가 세포 속으로 쫙 스며드는 느낌. 혀를 감싸 도는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칵테일의 맛. 소주잔만 한 샷(Shot) 잔에 데킬라를 원샷(Straight)으로 입안에 털어 넣는다. 소금과 레몬을 쭉 빨면 몸서리가 쳐지며 목덜미가 불에 타는 듯 미묘한 끌림이 재미있다. 술의 종류나 가격이 아니라 누구랑 어떤 기분 상태로, 어떻게 마시느냐가 중요한 것도 남편에게서 조금씩 배워 나간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가끔 마시는 한두 잔의 술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지나치면 건강을 잃는다. 새로운 친구를 만날 기회가 되거나 상대의 진솔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이게 되거나 과격해지고 자칫 사고로 이어지는 위험을 담고 있다.

필요한 물건이 있냐고 한국의 가족들이 물으면 남편은 'Only 소주'라 답한다. 내 입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 병에 담긴 수출용보다 팩 소주가 더 맛깔스럽단다. 그러나 토네이도를 만들지 못한 아쉬움은 숨기지 못한다. 소주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처가 식구들과 함께 하는 자리의 윤활유가 되어 주기에 좋단다. 대화는 잘 안 통해도 정을 나눌 수 있어 소주에 사랑을 채워 마신다나. 핑계가 좋다고 눈을 흘겨준다. 소주병에서 회오리가 돌 때마다 난 남편의 포근한 마음의 회오리를 탄다는 느낌에 빠진다. 그럴 때면 콧등이 이유도 없이 시큰해진다.

첫 잔은 사람이 술을 마시고, 두 잔은 술이 술을 마시며, 석 잔은 술이 사람을 마신다지 않는가. 경주하듯 마시는 one shot보다는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want shot이 되어야 한다. 과하지 않으면 술 빛 세상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다. 아슬아슬한 선을 넘지 말고 적정선에서 즐기는 사람이 진정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남편은 핸드폰을 열어 토네이도 만드는 방법을 또 보여준다. 번번이 실패하니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좌우로 재빠르게 흔들어야 하는 노하우도 전수해준다. 연습하면 나도 토네이도를 멋지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보다 인생의 시련도 소주병 속의 토네이도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으면 누구나 인생의 회오리바람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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